아파트 뒷산의 오솔길
 
김대갑 기자

 이 세상에 오솔길은 여러 가지가 있다. 강가의 오솔길, 숲속의 오솔길, 들판의 오솔길, 도시의 오솔길 등이 있는가 하면 칸트나 데카르트가 사색하면서 걸었던 철학의 오솔길도 있다. 오솔길의 어원을 한번 분석해보면 참 재미있는 것을 발견한다. 오는 외롭다는 말의 외가 바뀐 것이며, 솔은 가늘고 좁다는 뜻이다.
 
길은 인간이나 개와 같은 동물들이 지나가는 물리적 공간을 말한다. 결국 오솔길은 외로우면서 가늘고 좁은 길이라는 뜻이다. 흔히 오솔길하면 숲 속의 오솔길을 생각하지만, 좀 더 사고의 폭을 확대해보면 오솔길은 굳이 숲 속이 아니더라도 위와 같이 우리 생활 곳곳에, 우리 마음 속 한가운데에 얼마든지 널려 있는 것이다. 그러나 역시 오솔길은 들꽃과 이름 모를 새들이 지저귀는 한적한 숲속의 오솔길이 제격이다. 

  매일 아침, 나는 아파트 뒷산의 작은 오솔길로 산책을 하러간다. 그 오솔길은 서재 베란다 너머의 야트막한 언덕에 외로이 누워있는데 한 사람이 겨우 지나 갈 정도로 좁디좁은 길이다. 그 길의 초입엔 후손들이 돌보지 않아 늘 잡초가 무성한 봉분 하나가 덩그러니 자리 잡고 있다. 봄이면 진달래며 찔레꽃, 접시꽃이 봉분 주변의 오솔길에 소담스럽게 피기도 하며, 비비추나 금난초가 하늘거리며 여린 솔잎을 맞이하기도 한다. 

  그런데 뒷산이라고 해봐야 해발 100m도 채 되지 않는, 산이라기 보단 작은 언덕이라고 부르는 것이 더 어울리는 곳이다. 장산이며 와우산이며 또 저 멀리 보이는 황령산에 비할 바는 아니지만 그래도 나에겐 회색빛 콘크리트 사이로 살포시 솟아올라 작은 위안을 주는 더 없이 소중한 곳이다. 정상에 오르면 우선 한눈에 청사포가 내려다보이고, 동해와 남해가 만나는 드넓은 바다가 눈이 시리도록 푸르게 펼쳐진다. 이 소중한 뒷산에 작은 오솔길이 한적하게 자리 잡고 있는 것이다. 늘 걸어 다니는 오솔길이지만 이 길의 존재가 참 소중하게 느껴질 때가 많다. 그리고 너무 신기한 생각이 들기도 한다. 가쁜 숨을 몰아쉬며 정상의 소나무 둥지에 앉아 눈을 감아 보았다.
    
   먼 옛날, 그때도 이 산은 이 자리에서 청사의 시린 포구를 굽어보며 소박하게 앉아 있었을 것이다. 인간이 지구에 출현하기 훨씬 전, 짐승들이 이 산을 먼저 찾았을 것이고 그네들에게 이 산은 소중한 삶의 터전이었으리라. 청설모, 다람쥐, 토끼 같은 작은 짐승들이 언제나 같은 길을 걷고, 뛰어다녔으며 그들의 흔적을 좇아 큰 짐승들이 같은 길을 걷고 뛰어 다녔겠지. 수많은 세월이 흐르고 흘러 작은 짐승들과 큰 짐승들의 반복된 걸음들이 하나의 길을 만들었을 것이다. 그리고 그 길을 인간이라는 짐승이 자연스레 이용한 것이 아마 오솔길로 굳어 졌을 것이다.

   계속 눈을 감고 있으니 이제 다른 감각기관이 서서히 깨어난다. 코끝으로 해풍에 실린 솔 향이 느릿느릿 지나가고, 종달새의 울음 같은 새소리가 귀를 간지럽게 한다. 이제 눈을 뜨기가 싫어졌다. 그래 꿈이나 한 번 꾸고 가야겠다.    
   난 하나의 꿈을 꾼다. 이른 신 새벽, 아침 햇살이 생솔나무 가지 사이로 엷게 비치는 오솔길을 걸어가다가 기화요초가 만발한 숲을 만나는 꿈을.   

   난 또 하나의 꿈을 꾼다. 늦은 봄의 한가한 오후, 갑자기 작은 비가 가엾게 내려 물안개가 숲속의 오솔길에 살며시 스며들 때, 노란 우산을 받쳐 든 딸아이의 얼굴에서 희망이라는 꽃망울이 터지는 사랑스런 꿈을.
    
  갑자기 소란스러운 소음에 나의 작은 꿈은 슬며시 자리를 털고 일어나야 했다. 한 떼의 등산객들인데 참으로 요란한 옷차림에 산이 저희들 것인 양 너무 떠들고 있었다. 가만히 일어나 걸음을 옮길 수밖에. 다시 오솔길을 걷기 시작한다. 그런데 한참 가다보면 제법 큰 길과 만나게 되는데 지금은 사용하지 않는 일종의 군사도로이다. 이 도로를 따라 조금 걷다 보면 콘크리트로 지어진 폐건물을 몇 채 만나게 된다.
 
아름다운 숲 속에 악취를 풍기며 을씨년스럽게 서있는 건물을 보는 순간, 심한 불쾌감에 조금 전의 그 맑은 꿈이 산산이 부서지고 만다. 가까이 가보니 그 건물은 다름 아닌 군사용 건물인 것이다. 씁쓸한 기분에 맥이 쭉 빠지고 만다. 자연을 자연대로 놔두지 않는 인간의 무지몽매함이란!

  아무리 생각하고 또 생각해봐도 인간사는 너무 유한하지만 자연은 굳건하고 당당하니 참 부끄럽고 서러운 맘이 절로 생기기도 한다. 뒷산의 작은 오솔길 하나도 천년의 세월을 이긴 영원의 모습을 가지고 있는데, 우리네 작은 삶은 얼마나 보잘 것 없는가? 이 보잘 것 없는 인생살이에 전쟁과 폭력, 시기와 질투, 음모와 배신의 추악한 모습이 웬 말인가? 

  난 오늘도 푸른 모래의 전설이 서린 작은 포구를 넉넉한 중국대륙처럼 감싸 안는 뒷산의 오솔길을 오른다. 내가 지나온 오솔길 위엔 나의 초라한 궤적이 조용히 찍혀 있을 것이다. 어쩌면 이 길을 걸어가면서 생긴 나의 궤적은 오랜 세월 전에 이 길을 걸었던 어느 원시인의 궤적 위에 그대로 쌓이는 지도 모른다.
  두렵다. 일엽(一葉)같은 이윤을 추구하는 몽매한 인간들이 이 뒷산의 오솔길마저 없애고 회색빛 건물을 만드는 것이. 만일 그리되면 옛사람과 현세의 내가 만들어 놓은 소중한 궤적들이 미래의 어떤 존재가 밟아보기도 전에 사라지고 말 것이다.

  안타까운 심정으로 작은 포구를 하염없이 쳐다만 본다.
기사입력: 2005/06/03 [10:49]  최종편집: ⓒ 호남조은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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