꼭 알아야 할 5,18
 
사설

5.17쿠테타를 통해 정권을 탈취한 전두환을 추종하는 일부 하수인들의 천거로 언론장악을  위한 제반 음모는 계엄포고령 등을 위반 했다는 죄목으로 광주학살의 진상을 보도하고자 했던 언론인을 구속하는등 직접적 탄압의 총 칼을 휘두르며 언론을 강제로 해직 시킨 사건이기도 하다
. 5,18운동은 1980년 5월 18일에서 27일까지 전라남도 및 광주 시민들이 계엄령 철폐와 전두환(全斗煥) 퇴진, 김대중(金大中) 석방 등을 요구하여 벌인 민주화 운동이다
 
1997년 4월 17일, 5·18 주범들에 대한 반란 및 내란죄가 확정된 뒤, 같은 달 정부에서 5월 18일을 ‘5·18민주화운동기념일’로 제정 발표하고 그해 5월 18일 정부 주관 아래 첫 기념일 행사를 가졌다. 이로써 5·18 책임자에 대한 형사처벌과 함께 광주민주화운동특정 지역의 민주화운동이 아니라 전국민적 차원의 민주화운동이었다는 역사적 평가 및 정당성을 인정받게 된 것이다.

전두환은 군부를 규합하고 있었고 그를 중심으로 한 군인들은 10.26사태라는 민주화의 과도기를 틈타 12·12 통해서 정권을 잡게 되었다. 전두환은 당시 크게 치솟아 오르던 국민의 민주화 열기를 없애기위해서는 민주화운동세력 및 야당세력 등의 지지하지 않는 세력을 제거해야하는 필요성을 느끼게 되고 그것을 하기위해 제물로써 결정한 곳이 광주였다. 야당의 지지도가 높고 또한 가장 많은 지지를 받고 있던 야당의 당원 , 김대중의 정치적 기반 및 고향이되는 곳이 광주였다.

전라도 광주는 군사 독재정권을 통한 경제계발계획에서도 철저히 소외되었고 지역감정이 생겼고 경제적으로도 상대적으로 떨어지게 되었다.

 이곳은 민주화 운동이 열심히 열리고 있었고 민주의식도 상당히 높았다. 그래서 전두환 대통령은 광주를 중심으로 큰 탄압을 가장한 학살을 하게 되고 광주 국민들 및 전국민들은 이에 대항한다. 
 
5·18민중항쟁은 12· 12사태를 통하여 군 내부와 국가권력을 장악한 전두환 중심의 신 군부집단이 5· 17 비상계엄령 확대 조치라는 형식을 빌어 집권음모 쿠테타를 감행한 후 이를 항의하는 시민과 학생들의 시위를 공수특공대 등을 동원하여 무자비하게 진압함으로써 발단되었다. 따라서 5·18민중항쟁은 불법적으로 집권을 획책하는 전두환 및 신 군부세력을 거부하고 민주화를 요구하며 일어선 시민 봉기이다.

전국의 모든 국민들이 군부의 무력 앞에 숨을 죽이고 있는 상황속에서 군부의 거대한 무력에 맞서 싸우면서 민주주의를 쟁취코자 전개된 5·18 민주화운동은 민중 스스로가 역사의 주체임을 선언하고 자신의 권리를 지키려는 강한 염원이 분출된 것이다. 첫째는 거의 모든 시민들이 자발적으로 공수부대의 야만적인 폭력에 굴하지 않고 하나가 되어 싸웠다는 점이다.


당시의 상황에서 항쟁에 참여한다는 것은 자신의 생명까지 포함한 모든것을 버릴 각오가 아니면 불가능한 일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광주시민과 학생들은 한 두 명의 영웅적인 항쟁이 아닌, 시민 전체의 이름으로 하나가 되어 그에 저항했으며, 당국에 의해 폭도들의 난동으로 매도 되면서도 광주시민들은 비 인간적인 폭력에 저항하는 것이 자신들의 생존권을 지키는 길이고, 정의에 부합하는 것이라는 신념을 갖고 그 길을 걸었던 것이다.

둘째는 광주시에서 계엄군이 퇴각하고 시민군이 시내를 장악한 이후 다시 게엄군이 진주할 때까지 6일 동안 광주의 시민들은, 특히 이 지역의 민중들은 그들이 갖고 있는 도덕성을 유감없이 발휘했다는 점이다.


그 기간 동안 광주시는 공식적인 치안체계가 완전히 붕괴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거의 완벽한 치안체계를 유지하였다. 그토록 많은 총기류가 시민들의 수중에 있었지만, 그로 인한 불상사는 단 한 건도 발생하지 않았다.

금융기관이나 금은방 등 평소 범죄자들이 노릴만한 곳에서도 이 기간 중에는 아무 일도 발생하지 않았다. 이런 사실은 세계 민중항쟁 역사상 유래를 찾을 수 없는 것으로 광주시민들은 성숙한 민주의식과 공동체 의식을 견지하였다는 점에서 5·18광주민중항쟁이 오로지 민주주의의 구현을 위한 시민봉기였다는 점을 다시 한번 증명하고 있다.

셋째는 항쟁의 전 기간 동안 광주시는 하나의 공동체를 형성하며 위기를 가장 인간다운 삶의 협동으로 대처했다는 점이다. 광주시가 계엄군에 포위된 채 완전히 고립된 상황에서, 대중매체와 군 정보요원을 통한 교란작전이 난무하는 상황에서, 그리고 그러한 상황이 얼마나 지속될지 아무도 알 수 없는 상황에서 광주시민들은 각자가 갖고 있는 것을 서로 나누며, 서로 의지하고 격려하면서 살았다.먹을 것이 필요한 사람에게는 음식을 나누어 먹고, 피가 부족한 부상자에게는 피를 나누어주었으며, 일손이 필요할 때는시민들 누구나 가 달려들어 그 일을 함께 하였다.


항쟁지도부가 수습의 방법을 두고 고심할 때 일반 시민들은 하나가 되어 어려움을 이겨 나갔던 것이다.

5·18민주화운동은 과거 우리나라 역사적인 민중항쟁을 통해 표출되었던 동학혁명 및 4·19와 더불어 자주. 민주. 통일의 전통을 계승하였을 뿐 아니라 이 땅의 민주주의를 앞당긴 승리의 항쟁이며 민주화의 발전사에 불멸의 금자탑을 세운 민중항쟁으로 더욱더 찬란한 역사속의 빛으로 승화 될 것이다


그들은 민주주의의 기본원칙인 삼권분립이 무시된 권력남용으로써 총칼에 의한 폭력의 정치를 감행하였으며, 구악을 일소하고 초특급 신악을 창조하는 이른바 "오적"시대를 전개하면서 정치도의는 물론 민족의 기본적 인권을 짓밟기에 이른다.

그들은 언론을 영원히 장악하려던  그들의 헛된 꿈은 오래갈수없었다
지난 87년 국민항쟁과 5공의 몰락 청문회를 통한 역사 바로잡기작업으로 언론의 생명은 총칼로도 끊을수 없둣 그누구도 했빛을 찿아 움터오는 언론의 자유를 짓밟아 버릴수 없다는 것을 재확인 할수있었다
 진정한 민중의 필은 그 누군가 가 가져다 주는 것이 아니라 역사의 진실과 생명을 여실히 보여주고 있다

기사입력: 2005/05/26 [08:36]  최종편집: ⓒ 호남조은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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