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도 독도 사람이다 (하)
6.25 제 55 주년에 부쳐
 
정정부 기자

경상북도 울릉군 남면 도동 1번지.  울릉도 남동쪽 90킬로미터 지점에 위치한  조그만 바위섬인 독도가  영유권 문제로  두나라 사이에 항의각서가 오가고 있는 한편으로  1953년 6월  일본은 해상보안청및 출입국 관리국 직원등 30명을 순시선 2척에 태워 독도에 상륙하여 일본영토라고 푯말까지 세우기도 했다.

그리고   즈지(什富藏)  라는 노인은 독도에 인광(燐鑛 )을 소유하고 있다고 주장 일본정부에 당시기준으로 1백 30만 달러의 손해배상청구를 하겠다고 나서기도 했다.
 
드디어 1954년 1월 18일 평화선 선포 2주년을 맞아  독도에 영토표지를 하고  같은해 5월에는 민간 수비대 20명을 파견하였으며 일본의 침공설이 파다하게 나돌자  9월2일 독도의 무장화를 결정하기에 이르렀다.
 
54년 초 까지  부산 수산시험장  소속  실습선을 타고 있던  아버지께서 독도 수비대가 조직되어 독도경비전용 경비정 동해호 –나포한 일본 어선(속칭 데구리선)을 개조하여 만든 목선 으로  시속 8놋트 – 가 진수하게되자  기관장 으로  옮겨 근무하게 되어  울릉도와 독도와  인연을 맺게 되었다.  그 뒤로 내 기억에 의하면  계속 경비정 기관장으로  16년간 근무하는 중 소속은  독도 경비대 , 해양 경비대 , 울릉경찰서, 포항경찰서 등으로 바뀌었던 것을 기억한다.
 
내가 중학교를 졸업한 이듬해   고향 남해를 떠나  울릉도  저동으로  새로운  섬에다가  삶의 터전을 잡았었고,  덕분에  여름 방학 때는 한달에 두번씩 독도에  경비요원의 교대와  보급품을 실고 가는  경비정을 타고  독도에 가서  간혹 낚시 도 하고  한번은 2주간을  경비대 아저씨들과  아예  같이 생활 해 본적도 있었다.

참 으로 멋모르고 독도 경비 요원 노릇을 했던 것이다. 
 
물론 당시에  이런 일이 외부에 알려지면 아마도  심각한  처벌감이었겠지만, 50년대 말  닭서리, 밀서리, 감서리를 해도  야단은 치면서도 그러려니 하던 배고픈 중에도 인심은 후하던 시절이어선지 나같은 고등학생을 거부하지 않고 받아주던 경비대  대원들의 따스한 베품이  정말  그립고  기억에 삼삼하다.
 
동도와 서도 . 사자암 . 그리고  포항 울릉도간을  파도가 없는 좋은 날씨를 만났을 때  8시간을 소요했던  끝간데 없이  펼쳐지는  넓은 동해 바닷길… 이 포항 울릉도 뱃길따라  타고가던 동해호 경비정에서  어느 여름방학 때  운명의 여인을 만난 인연으로  1971년 결혼하여 34년동안  서로 별 풍파없이 부부생활을  해오는 복을 누림에도 감사한다.
 
그리고  아버지께서  육이오 때  배가 갈아 앉을 지경에 이르도록 월남민을 싣고  내려온 것과  16년간  독도 경비 임무를  담당하므로써  나라의  한쪽 경계를 지켜내신 일이 새삼스럽게 자랑스럽게 여겨진다. 

1964년 부터  66년까지 겨우 3년간의 국방의무를 마친 것이  나라 지킨 일에   직접  나를 바친 전부이지만  그래도 누구보다도  더 마음 다하여  깊은 애정으로 독도를 지키고 싶은 것은 그래도  내 청소년기의  많은 날들을 차지하고 있는 추억 때문이리라. 
기사입력: 2005/06/25 [16:02]  최종편집: ⓒ 호남조은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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