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범 김구(金九) 발자취를 찾아서 < 2 >
조국 광복에 투신
 
김동문 논설위원
국모의 원수를 갚기위해 일인을 죽엿다는 이유로 백범이 체포되어 재판을 받을 때마다 밀려든 방청객으로 부터 영웅이란 말을 듣게 되었다. 사람을 죽인 죄로 사형 언도를 받고 사형 집행일을 기다리던 백범은 고종 황제의 도움으로 탈옥에 성공했다.

탈옥후 충청도 공주 마곡사에서 중이 되려다가 1년을 끌지 못하고 속세로 나왔다. 다시 일본 관헌의 눈을 피해 고향 해주로 돌아와 구국의 길이 서양의 과학 문명을 받아드려야 한다는것을 알고 신문화 운동과 신교육 운동을 마을 청년과 함께 시작했다.

그때까지도 총각으로 있는 백범에게 한 처녀가 나타나 정혼을 하려든 참에 그녀가 뜻하지 않는 사고로 죽게 되었다. 백범은 그후 기독교에 귀하하여 신식학교를 곳곳에 세우고 순회강연도 하는 등 국민계몽에만 힘썼다.
 
그 후 정식 혼례를 하게 되니 나이 30, 신부는 같은 기독교 신자며 서울 태생인 최준례란 여성이다.그리고 부인을 정신여학교에서 공부하도록 했다. 1909년 백범이 34세 되던 해, 하르빈 역에서 이등박문이 암살되고 안중근이 현장에서 잡히자 백범은 공모혐의로 갇히게 되었다.
 
아무런 혐의 사실을 발견하지 못한 일경은 1년후 출감시켰다. 그 후 서울에 거처를 정하고 여러 우국 동지들을 모아 신민회를 조직하여 안창호, 이동령과 함께 신민회원들을 이끌고 만주에서 신흥 군관학교를 세워 독립군의 기간이 되었다.
 
당시 황해도 안악에서 안악 양산 중학교장으로 재직 하다가 1911년 백오인 사건으로 투옥되어 3년의 형을받고 옥중에서 복역 중 사내 총독 암살미수로 12년이 가형되어 1919년에야 출옥할 수 있게 되었다.
 
이때 나이 43세, 마침 국내에서 3.1운동이 일어나자 상해로 망명하여 대한민국 임시정부 경무국장에 취임하고 두 아들을 낳으니 그들이 바로 인과 신이다. 그러나 부인 최여사는 얼마 안되어 백범을 홀로 남기고 세상을 떠났다.
 
상해에서 백범은 한국 독립당을 창립하고 한인 애국단을 조직하여 단장으로 있었다.백범은 그동안 이봉창을 동경에 파견하여 일본 황제 암살을 계획하다가 실패는 했지만 상해 홍구 공원에 윤봉길 의사를 밀파하여 백천 대장, 식전 중장, 중광 대사 등을 격살하여 한민족의 애국정신을 국제적으로 선양했다.
<2회끝>
 
기사입력: 2005/06/29 [02:20]  최종편집: ⓒ 호남조은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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