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생 때 일짱이었던 내 친구
고통의 유익
 
안희환 기자



가끔 친구들과 만날 기회가 있다. 이제 어느 정도 나이를 먹었고 저마다 해야 할 일이 많기 때문에 학창시절처럼 만날 수 없는 친구들과의 만남은 참으로 소중하다는 생각이 든다. 다른 사람들에게 하지 못하는 이야기들도 친구이기에 할 수 있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또 세월따라 변해가는 서로의 모습을 보면서 옛 그리운 추억들을 떠올릴 수 있기 때문이다.

얼마 전에 외국에서 온 친구를 위해서 몇몇의 친구들이 함께 모였다. 삼겹살을 구워먹고, 가져온 케익을 또 먹고, 거기에다가 아이스크림케익까지 먹은 후에 더 이상 넘길 여지가 없어지자 자연스럽게 이야기를 나누는 것에 집중되었다. 그리고 이야기하는 중에 오랜 친구이면서도 듣지 못했던 이야기를 듣기도 했다.

그 중 하나의 재미있는 에피소드를 말하고 싶다. 친구 중에 태호라는 친구가 있다. 그 친구는 키가 크고 덩치도 조금 있는 편이다. 그런데 그가 어릴 적에 일짱이었다고 하는 것이다. 요즘식으로 하면 일진회의 일짱쯤 될 것이다. 단 한번도 짱이라는 것과 상관없이 살아온 내게 그 이야기는 그야말로 솔깃했다. 얻어맞고 다니지는 않았지만 그렇다고 다른 친구들에게 호령하는 입장도 아니었던 내게 일짱이라고 하는 것은 독특한 존재인 것이다.

그런데 그 친구가 일짱이 된 비결이 상당히 재미있었다. 그 친구에게는 형이 있었다. 그 형은 성격이 사납고 힘이 좋았는데 내 친구는 그 형에게 무지막지하게 얻어터지곤 했다고 한다. 그것이 일상이었다는 것이다. 그러다가 친구들과 싸우게 되었는데 아무리 맞아도 형에게 맞던 것이 비하면 별거 아니었다고 한다. 그러다보니 겁도 나지 않고 그냥 맞붙게 되는데 그러다 보니 자연스럽게 일짱이 되었다는 것이다.

형에게 맞은 강도가 워낙 세서 친구들 주먹은 우스웠다는 친구의 말을 들으면서 다소 엉뚱한 쪽으로 그 이야기를 연결시켰다. 고난을 겪는 것이 이와 같지 않을까 하는 것이다. 특히 큰 고난을 겪은 사람에게 고난이 유익할 수 있는 것은 큰 고난을 극복한 후 겪는 작은 고난은 더 이상 무섭지 않다는 것이다. 그런 것이 성숙됨이 아닐까? 그러고 보면 세상사에 무의미한 것은 없는 것 같다.

이것은 나 자신의 고백이기도 하다. 어릴적에 나는 몇 차례 죽음의 문턱을 넘어설만큼 힘겨운 과정들을 겪었다. 질병 때문에, 그리고 사고 때문에 죽음가까이에 갔다가 되돌아온 것이다. 어린 시절이지만 사는 게 참 힘들고 고통스럽다는 생각을 했다. 날마다 울면서 기도하던 모습이 지금도 떠오른다. 그런데 그런 일들을 겪고 난 후부터는 웬만한 것에 영향을 받지 않는 나 자신이 되었음을 알게 되었다.

당장은 아프고 고통스럽고 억울하고 열이 나겠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세게 얻어터져보는 것은 나쁘지 않다는 생각은 그런 과정을 통해 형성된 것 같다. 우리가 그토록 싫어하는 극심한 고난조차도 이렇게 생각을 바꾸고 고난을 대한다면 고난은 그리 공포스런 존재도 아닐 것 같다. 살다 만나는 좀 별난 벗 정도라고 해야할까?
기사입력: 2005/08/24 [08:04]  최종편집: ⓒ 호남조은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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