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남참전용사들을 매도하지 말라
외교문서 공개와 왜곡에 앞장선 국내언론
 
지만원
▲월남전 참전용사 환송(동대문운동장)    

[특별기고] = 연합뉴스가 박정희 때리기에 앞장섰다. 2005.8.27자 신문들에, 전날 공개된 외교문서를 일방적으로 해석해 기사를 내보냈고, 동아, 조선 등 우익 일간지들도 연합뉴스를 그대로 베껴 박정희와 파월용사들을 폄하했다. 이 기사중에 이런 비난이 들어 있다.  

“주월 미군의 1인당 비용은 1만3천달러, 파월한국군은 5천달러, 필리핀 비전투원은 7천달러. 필리핀에 비해 몸값을 터무니없이 싸게 팔았다”  

“미군의 1인당 비용이 13,000달러인데 반해, 한국군이 왜 5천 달러에 불과하냐?” 이렇게 이의를 제기하는 신문은 없다. 모두가 “필리핀 군인도 7천 달러였는데 어째서 한국군인이 5천 달러였느냐?”라고 비난한다.  

이 비난에는 한국군 1인당 비용이 미국인보다는 싸야한다는 것은 충분히 인정한다는 암묵적인 합의가 들어 있다. 그러나 왜 우리보다 못사는 필리핀보다 더 못 받았느냐에 대해서는 인정할 수 없다는 것이다.

미군 비용이 한국군 비용보다 더 많다는 것을 인정한다는 것은 미국이 우리보다경제적 선진국이라는 것을 감안했기 때문일 것이다. 미국의 임금과 한국의 임금은 분명 다르다. 지금도 한국인 1명을 살 돈으로 중국인 10명을 산다. 중국인 한 사람을 고용하면서 한국인에 주는 봉급을 똑같이 주어야 한다면 왜 한국기업들이 중국으로 싼 임금을 찾아 나가는가? 똑같은 이유로 군인도 국적에 따라 몸값이 다르다.

필리핀! 지금 현재, 필리핀의 1인당 GNP는 1,000달러, 태국은 2,000 달러, 한국은 1만 달러 수준이다. 한국이 10배 더 잘산다. 그러나 1960년대에는 달랐다. 남한의 GNP 79달러, 북한 117 달러, 태국과 필리핀이 각 300달러 수준이었다. 당시를 살았던 사람들이라면 필리핀과 태국은 새까맣게 올려다 보이는 선진국이었다. 이런 통계를 감안한다면 그 누구도 당시 한국군인의 몸값이 너무 가벼웠다 말 할 수 없을 것이다. 
          
박정희와 월남참전 비하하는 좌익들

한겨레21에 실린 한홍구(성공회대) 교수의 글이다. "동일계급을 비교할 때, 필리핀군이나 태국군의 30-40%에 불과한 싼값에 우리 젊은이들을 베트남으로 보냈을까?", "대일 청구권 문제는 무상 2억 달러, 유상 3억 달러의 형편없는 헐값에 끝내고 말았다. 당연히 일본으로부터 배상 받아야 할 금액을 받아내지 못하고, 그걸 보충하려고 젊은이들을 사지로 내보낸 박정희가 유능한 대통령일 수 있을까?",

한 교수는 2000. 5. 6일 심야토론에서 용병론의 근거를 값싼 피 값이라고 했다. "한국 소장 354불, 필리핀 소대장 442불, 태국 소대장 389불"을 내걸며 값싼 용병이라 주장한다. 소위 수당을 보자. 한국군 소위 151.55 달러, 월남군 103.35, 미군 435.85, 필리핀군 441.92, 태국군 389.33 달러였다.

여기에서 한홍구 교수는 눈에 보이는 비교표만 본 것이다. 이런 비교는 누구라도 한다. 필리핀과 태국은 한국군이 누렸던 특수를 누리지 못했다. 파월 기간중 한국군 병사가 고국에 송금한 수당은 1억7,830만 달러에 불과했지만 한국군과 직접 연관되어진 "월남으로부터의 송금액"만 해도 8억5,760만 달러다. 수당은 전체 송금액의 불과 20%에 불과한 것이다.

이를 가지고 각국 장교들과 비교해보자. 한국군 소위가 직접 받는 수당은 불과 151.55 달러지만 소위 한 사람이 정부에 벌어준 돈은 757.75 달러였던 것이다. 이는 가장 많이 돈을 받는다는 필리핀 장교 수당의 1.7배나 된다. 여기에 무역, 외자 유치 등의 효과를 합하면 1인당 17,000달러가 된다. 이는 필리핀 소위 수당의 40배나 된다.

여기에 파월 효과가 빚어낸 외국인 투자, 수출효과, 해외진출 효과, 이민효과, 경제 및 군사원조, 한국군 현대화, 방위산업, 대미수출, 중동특수, 한강기적이 일궈낸 가치 등을 종합해보자. 태국과 필리핀에게 이런 특혜가 주어졌던가? 숫자를 놓고 단순 비교를 하는 것은 누구라도 한다. 한국현대사를 쓰고 있는 교수의 분석력과 시각이 이러하면 한국현대사에 문제가 있다.

베트남 참전은 조국근대화를 이끌어낸 원동력이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일반 국민에게는 파월 한국군의 성과에 대한 결산서가 제공된 적이 없다. 이는 국가발전의 최고 수훈자들인 파월 장병들의 노고를 묻어버리는 매우 서운하고 유감스러운 일이었다.

이러한 빈틈을 파고들어 파월 한국군을 학살집단이요 용병으로 매도하는 집단이 있다. 33세의 여성 특파원 구수정씨를 중심으로 모인 희한한 집단이다. 그녀는 국내에서 국가 소용사태에 관련돼 처벌을 받은 것으로 알려졌다.

한겨레 21, 동국대 강정구 교수, 성공회대 한홍구 교수 등이 구수정 여인을 추종하면서 베트남 양민 학살론을 창조하고 있다. 이는 박정희 전대통령을 격하시키고, 32만 파월 장병 및 500만 파월 가족의 명예는 물론 한국군 전체의 위상과 명예를 격하시키는 음모다.

1999년 9월2일자 한겨레21 273호가 주월 한국군을 20세기의 광기와 야만 그리고 용병으로 정의했다. 베트남전을 민족해방세력과 반역세력간의 대결로 정의했고, 미군, 한국군, 월남군 그리고 월남전에 참전한 호주군, 뉴질랜드군, 대만군, 필리핀군, 태국군, 영국군을 반역군으로 정의했다. 정확히 공산주의 로선이다.

구수정이라는 여성 통신원이 이끄는 폭로 기사는 1년이 넘도록 계속됐다. "젖먹이까지 죽이고도 모자라 무덤조차 불도저로 밀어버렸다", "갈기갈기 찢겨져 흩어진 살점과 뼛조각을 주우려는 사람들이 줄을 이었다". . . 하늘도 눈이 멀던 그날에".

한홍구 교수의 글에 나타난 대일 청구권 배상액도 사실과 다르다. 실제로는 무상원조 3억 달러, 재정차관 2억 달러, 상업차관 3억 달러인데도 불구하고 한홍구 교수는 "대일 청구권 문제는 무상 2억 달러, 유상 3억 달러의 형편없는 헐값에 끝내고 말았다"고 적고 있다. 사실과 다르지 않은가? 

개구리 올챙이 시절 기억해야

당시 한국군의 실정을 보자. 한국군 유지비의 70%가 군원으로 충당 됐다. 군간부들은 한편으로는 박봉에 시달리고, 다른 한편으로는 고루한 군사문화에 숨 막혀 했다. 소위의 국내 봉급은 겨우 5,350월, 소득세 등을 제하고 나면 실수령액이 4,596원이었다. 환율은 1달러 당 255원이었다. 불과 18불이었다.

고급장교들은 시각이 좁아 공연히 부하 간부들을 괴롭혔고, 비전 없는 군 생활에 하급장교들의 불만은 포화상태로 치닫고 있었다. 바로 이때, 장교들에게는 눈이 번쩍 뜨이는 기회가 생겼다. 파병해서 죽고 사는 건 그 다음의 문제였다.

우선은 현실로부터 도피하고 싶었다. 전투경험을 갖지 못한다는 것은 남부다 뒤떨어지는 것이기도 하지만 비겁한 것이라고까지 생각했다.

당시 소위가 받았던 전투수당은 120달러, 그래도 국내봉급까지 합치면 월수입은 7.6배로 향상됐다.

파월 장병들의 사회적 인기는 대단했다. 이광재 아나운서는 "국가의 명예를 양어깨에 짊어지고 보무도 당당히 행진하는 저 늠름하고 자랑스러운 대한 건아들의 모습을 보라"며 북받치는 감격을 주체하지 못해 눈물을 흘렸고, 연예인, 주부, 여학생들이 거리로 나와 행진하는 파월 장병들에게 꽃다발을 걸어주었다. 종로통의 거리와 빌딩 속 창가에는 환송 인파로 인산인해를 이뤘다.

당시에는 파월장병이 최고의 인기였다. 전국에서 위문품이 쇄도하고, 쏟아지는 위문편지, 펜팔이 장병들을 신나게 했다. 대한 뉴스의 앞머리는 거의가 다 파월 장병의 업적에 관한 것들이었다. 이러한 감격은 파월 장병의 가슴에 가장 아름답고 신났던 추억으로 살아 숨쉬고 있다.

파월로 인한 가시적인 성과는 엄청나다. 그에 못지않게 중요했던 것은 군의 현대적 사고방식과 행정현대화였다. 합리적인 사고 방식을 훈련하고, 국제 매너에 익숙해지게 됨으로써 군사문화가 획기적으로 발전됐다. 이는 해외 유학보다 더 큰 기회였다.

한국군은 실전경험 특히 북한의 최고 위협이 되고 있는 비정규전 능력을 쌓게 되었고, 초 현대무기에 대한 개념을 터득했으며, 연합작전의 중요성과 방법에 대해 눈을 뜨게 됐다. 오랜 동안 외국의 지배를 받아왔던 피압박민족에 배어있던 무기력함과 자조적 열등감을 극복하고 우리도 하면 된다는 적극적인 사고방식으로 인해 오늘날과 같은 한국이 있게 된 것이다.

필자는 월남에서 42개월간 근무했다. 필자의 인생에 있어 가장 황금기요, 가장 값진 추억이 서려 있는 곳은 바로 월남이다. 인생을 회고할 때, 가장 이야기 거리가 많은 곳이 바로 월남이다. 파월 기회는 필자를 군인으로서 성장시켰고, 전쟁이 무엇인지에 대한 확실한 개념을 잡게 했고, 지휘와 경영이 무엇인지에 대한 진수를 터득시켜 주었다.

필자만 이런 평가를 하는 게 아니다. 육군3사관학교부설 충성대 연구소는 1999년에 1,000명의 일반 국민을 상대로 설문조사를 실시했다. 69.1%가 파병된 한국군을 좋게 평가했고, 좋지 않다고 평가한 사람은 불과 6.8%로 나타났다.

파병이 국가발전에 미친 영향에 대해서는 85.8%가 기여했다고 대답했고, 불과 4.8%만이 저해됐다고 답했다. 88.1%가 경제성장의 계기가 됐다고 답했고, 2.4%만이 악영향을 끼쳤다고 답했다.

파월이 국가발전에 기여했다고 보는 사람도 연령에 따라 다른 것으로 나타났다. 60대 이상에서는 89.0%가, 40-50대에서는 94.6%가, 20-30대에서는 60.7%가, 파월이 국가발전에 기여한 것으로 평가했다.

위 연구소가 265명의 참전 용사를 대상으로 조사했다. 다시 참전하라면 하겠느냐는 질문에 장교의 81.2%, 하사관의 83.3%, 병사의 59,7%가 재 참전 의사를 밝혔다. 파월 장병의 모습이 훌륭했다고 생각하는 장병이 69.1%, 파병이 국가발전에 기여했다고 생각하는 장병이 76.4%였다.

월남전을 계기로 한.미 안보관계는 새로운 차원으로 도약했다. 1961-65년, 5년간의 군사원조 총액은 8억1,500만 달러였다. 하지만 1968-72, 5년간에는 22억8,700만 달러로 껑충 뛰었다. 신예구축함 2대, M-16소총 국산화 지원, 유도무기 지원, 각종 방위산업 기술 이전, 파월 군 전체의 신무기 무장, 3개 향토사단의 정규 사단화, 17개 육군사단 및 1개 해병사단의 장비 현대화 등 이루 헤아릴 수 없을 만큼의 신무기 및 방위산업 기반을 구축하기 위한 원동력이 되었다.

1964년까지도 구호물자를 배급받던 신세에서 불과 4-5년만에 우리 힘으로 경제를 운용하게 됐고, 웅크리던 자세를 탈피해 해외진출에도 문제없다는 자신감을 얻게 했으며, 불과 8년만에 우리의 돈으로 방위산업을 육성하고, 군 장비를 현대화시킨 것이다.

그 외에도 외교 역량의 증대 및 한미 안보 관계의 강화는 돈으로는 환산될 수 없는 엄청난 도약을 가져다주었다. 막연히 돕겠다던 느슨한 협력관계가 "인계철선"과 "핵우산"이라는 구체적인 협력관계로 전환됐다.

아마도 주한미군 철수를 주장하는 사람들은 바로 이런 기회가 못 마땅하여 주월한국군을 격하시키려 할 것이다. 베트남전을 민족해방세력과 반역세력간의 대결로 정의하고, 미군과 한국군 등을 반역군으로 정의한 친북 세력은 아마도 김일성에게 민족해방의 기회를 허락해주지 않은 한.미안보협력강화 등을 비롯한 박정희의 업적을 못 마땅해 할지도 모른다. 

월남 참전이 이룩한 경제성장 효과

1966-1972년간 월남에서만 직접 획득한 외화는 8억7,250만 달러였다. 이중에서 장병 송금액은 1억7,830만 달러로 베트남으로부터의 송금된 전체 외화의 20.4%에 불과했다. 나머지 80%는 베트남으로의 수출, 베트남에의 군납, 파월 기술자 송금, 파월 지원경비, 파월 건설 및 용역에 의한 수입이었다.

미국의 후원과 한국군의 맹활약, 월남특수가 일궈낸 "신인도"에 따라 외국자본이 물밀 듯 들어왔다. 원조, 차관, 상품 및 용역 수출의 물꼬가 터졌다. 1965-1972간 외자 도입액은 32억8,820만 달러나 됐다. 대미수출을 보자. 1964년에 3,600만 달러였던 것이 1973년도에는 10억2,120 달러로 도약했다.

주한미군이 한국에 뿌린 돈이 8억 달러, 군원이관 중단액이 9,300만 달러 등 총체적으로 한국군이 월남특수로부터 얻어들인 경제적 이익은 50억 달러 이상으로 추산된다. 장병 1인당 17,000 달러씩 국가에 기여한 것이다. 이는 소위봉급 83년 치에 해당하는 돈이다.

이는 장장 14년간의 교섭 끝에 1966. 6.3일에 얻어낸 대일 청구자금 즉 무상원조 3억 달러, 재정차관 2억 달러, 상업차관 3억 달러, 도합 8억 달러에 비하면 엄청난 금액이다.

외화보유고를 보자. 1964년도 외환보유고는 겨우 1억 2,800만 달러였으나, 1975년에는 15억4,000만 달러, 1978년에는 49억4,000만 달러로 폭증했다. 남북한 1인당 GNP를 보자. 1953년, 남북한 1인당 GNP는 각기 67 달러와 53 달러로 남한이 1.2배 더 높았다. 그러나 1959-1965 6년간에는 역전됐다. 남한이 북한의 60-70% 수준으로 추락했다. 그러나 월남이 패망한 1975년에는 남한이 북한보다 1.4배 앞섰고, 1997년에는 남한이 12.8배로 앞서가고 있다.

한국군은 월남의 8개항만 중 5개를 장악하고 있었다. 이로 인해 월남의 주요 공사는 한국 기업이 맡았다. 당시 천막회사였던 한진과 현대는 기술도 없이 담요나 모기장 그리고 급수 대책도 없이 무작정 월남 땅으로 상륙했다. 한진은 월남에서 1.5억 달러를 벌어들였고, 현대는 캄란 부두 공사 500만 달러를 비롯하여 연평균 100만 달러 이상의 계약고를 올렸다.

1974년초 청와대 오원철 경제 수석이 박대통령에게 건의했다. "중동은 고온에다 모래 바람이 부는 열악한 땅이다. 금녀, 금주의 땅이라 선진국 근로자는 아무리 돈을 많이 줘도 가려 하지 않는다. 우리에겐 군인 정신으로 무장된 수십만의 제대 장병이 있습니다. 월남 참전 용사들도 많습니다. 여자 근로자가 만든 상경공업 상품을 수출하여 지탱해오던 한국경제의 패턴을 바꿔야 합니다".

1965년-75년 9년간 중동건설 수주액은 불과 2,400만 달러였다. 1974년에는 8,900만 달러, 1975년에는 7억5천만 달러, 76년에는 24억3,000만 달러, 77년에는 33억 8,700만 달러, 78년에는 79억 8,200만 달러를 기록했다.

오늘날의 기록과 비교해 보라. 그 엄청남 기술과 해외수주 기록을 가지고도 지금 현대를 비롯한 한국의 모든 건설업이 중동 수주에 냉대를 받으면서 줄줄이 도산하고 있지 않은가?

박대통령이 집권하기 이전에 한국엔 일자리가 없었다. 당시의 공식 통계만으로도 실업률은 1963년 29.9%, 1994년에는 29.7%였다. 공장이라고는 겨우 제분, 제당, 제약 회사들과 같은 것뿐이었고, 기계공업은 아예 존재하지도 않았다. 손톱깎이 하나 제대로 만들지 못했다. 강도와 정밀도를 규정하는 스펙이라는 개념은 존재하지도 않았다. 사회 전체가 무력감으로 가득 차 있었고, 청년들에겐 앞길이 막막했다.

박대통령은 월남에서 벌어들인 돈을 가지고 경부선, 댐공사, 발전소 등 대규모 인프라를 건설했고, 다른 한편으로는 기능학교들을 세워 기능공을 대량으로 양성했다. 국제 기능올림픽에서 금메달은 한국이 독차지했다. 한국은 기능공의 나라가 됐다.

박대통령은 외국에 특사들을 내보내 한국에 값싸고 질 좋은 기능공들이 많으니 들어와 공장을 지어달라고 호소했다. 대통령을 신뢰한 외국기업들이 줄줄이 들어와 공장을 지었다. 일자리가 갑자기 늘어나기 시작했다. 눈물과 한숨의 대명사 "보리고개"라는 말이 없어졌다. (군사평론가 / 시스템클럽 대표  지만원 박사)

기사입력: 2005/08/29 [10:09]  최종편집: ⓒ 호남조은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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