맥아더 바로알고 동상철거 운운하라
인천상륙작전과 맥아더장군
 
김동문 논설위원

 
▲맥아더 동상    

 
인천상륙작전의 실체

1950년 6월 25일 북괴남침으로 1백20마일 낙동강전선까지 밀린 8월19일자, 당시 미 육군참모총장 콜린스장군과 해군작전부장 셔어먼제독이 멀리 워싱톤에서 동경의 맥아더사령부를 방문, 동 22일 한국전선을 시찰하고 현지 수뇌들과 군사 회의를 열었다.
 
이 군사회의는 수세에 몰렸던 한국전선의 정세를 일변시키려는 중요 전술 전략문제가 논의되었고 콜린스장군은 "한국에서 유엔군 교두보를 유지할 자신이 있다"고 말했고 셔어먼제독은 "미해병대의 지상 항공 증원대와 극동 해군부대를 한국전선에 증원하겠다"고 언명, 이 회의에서 한국 전쟁사에 길이 남을 "인천상륙작전"이 계획된것이다.
 
이에따라 8월16일 해군이 인천공략의 전략적 요점인 덕적도에 공격을 시작 20일 완전 탈환했고 23일 영흥도, 9월10일자 연평도를 완전 점령하고 9월15일 저녁6시 한미 해병대는 비내리는 인천 월미도에 상륙을 시작한것이 "인천상륙작전"으로서 한국전쟁사에 길이 남는 역사의 기록이자 실체인것이다.
 
그런데도 56년전 6.25동란의 전쟁기록을 뒤바꾸려는 반미 주의자들이 한국의 은인맥아더 원수를 "점령군 괴수"로 매도하며 동상철거에 나섰으니 맥아더를 바로알고 그의 동상철거를 운운하라고 당부하고저한다.
 
1951년 4월 11일 트루만 대통령이 북진중인 맥아더 장군을 해임하자 그가 귀국하던날 뉴욕 거리에는 7백만이 넘는 환영 인파가 나와 열렬히 환영했고 뉴욕시의 고층 아파트에서 뿌려진 색종이는 전 뉴욕시를 뒤덮였으며 오늘날까지 명연설문으로 알려진"노병은 죽지 않고 다만 사라질 뿐이다"는 세계전쟁사에 명언으로 남아있다. 

뉴욕에서  맥아더장군의 귀국 연설문을 듣던 뉴욕의 7백만 환영 인파는 물론 전 미국 국민이 방송으로 흘러나온 "노병은 죽지 않고 다만 사라질 뿐이다"라고 말하는 순간 온 국민이 흐느껴 울었고 장군이 지휘하는 한국전쟁에서 수만명의 미군 병사들이 전사했고, 수만 명이 부상당한 전쟁의 참상을 알면서도 미국민들은 노병을 환호했다.

오늘날 반미주의와 맥아더동상 철거를 주장하는 일부 몰지각한 젊은이들을 바라보며 왜 한국전쟁 당시 맥아더 장군이 우리민족을 도왔는지 되새겨보자. 혹자는 미국이 자신들의 국익을 위해 우리를 도왔다며 억지를 부리는 자들이있다.
 
과연 그러했을까? 1950년 4월 6.25동란 2개월전에 미국 트루만 행정부는 "한반도는 미국의 태평양 방위선에서 제외된다"는 아치슨 독트린을 발표한바있다. 이 선언은 2차 대전 이전, 미국은 외국의 분쟁에 관여하지 않는 고립정책, 즉 몬로 독트린을 고수하여왔다.
 
때문에 한반도는 그 고립 정책의 대상 지역에서 하한선이며, 미국 태평양 방위선의 상한선이라는 점이다. 그런데도 한국 전쟁이 터지자 사흘 만에 서울이 함락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맥아더 장군은 단신으로 헬기를 타고 날라와 전쟁이 전개되는 상황과 한강 이남의 지형을 관찰하였다. 

그리고 이날(6월 29일) 새벽 6시 맥아더 장군은 그의 전용기 C-54를 타고 한강 남쪽 제방을 순시했던 것이 중요한 이유로 바로 여기서 인천상륙작전의 결심과 함께 트루만 대통령에게 한국전쟁 참전을 설득하였다.

그리고 맥아더는 9월 15일, 인천상륙작전 계획이 있음을 밝히며 본국으로부터 대규모 병력 증파를 요청했다. 당시 9월 15일은 밀물 때의 월미도의 수심이 너무도 깊기 때문에 맥아더 장군의 참모들도 인천상륙작전을 반대하였었다. 그러나 바로 그것이 인천상륙작전을 감행할 이유라는 것이 맥아더 원수의 논리였다.
 
한편 적의 입장에선 인천상륙작전은 불가능하므로 적군은 대비를 하고 있지 않을 것이다. 한국전에서 손을 떼는 것을 검토하던 미국 국방성 관리들도 당시 태평양의 맹장으로 알려진 맥아더 장군의 인천상륙작전의 고집을 꺽지 못하고 그가 요구하는 해병 병력을 추가 파병하여 주었다. 

1950년 9월 15일 인천상륙작전에따라 전세는 역전되고 9월 28일에 서울을 수복한데 이어 국군과 유엔군은 승승장구하며 북진하였다. 압록강까지 이루는 북한 전지역에 태극기가 휘날리고 그토록 그리던 조국 통일의 순간이 목전에 있었다. 그러나 중공이 김일성의 파병 요청을 받아들여 한국 전쟁은 또 다른 국면을 맞게되었다. 
 
당시 미국과 소련 양국에 외교를 맺고 있던 인도 정부가 중국 정부에 미국 트루만 행정부는 맥아더의 북진을 지지하지 않는다는 정보를 제공하여 주었다. 그리고 그것은 정확한 정보였으며, 이에 안심한 모택동은 백만 대군으로 알려진 대규모 병력을 파병하여 인해전술로 한국군과 유엔군을 공격하였다. 

인천상륙작전의 성공에도 불구하고 그의 북진이 트루만 대통령의 노여움을 샀다. 맥아더에게는 그 시기가 냉전의 후환을 없앨 좋은 기회였으나, 트루만 대통령은 전쟁이 장기화되거나 확대되는 것을 원하지 않았다.  

마침내 1950년 10월15일 트루만은 맥아더 장군을 태평양의 한 작은 섬 웨이크섬으로 호출,비밀 회동을 갖는다. 트루만 대통령은 맥아더 장군과 사이가 좋지 않았기로 유명하다. 그는 미국인으로서 한국인에 대해 깊은 애정을 가진 인물이었으며, 그런 의미에서 그는 피부색이 다른 우리 민족의 애국자며 그는 한국전쟁을 미국인의 전쟁이 되게 한 인물이자, 우리나라를 구하기 위해 십만 여명의 미국인에게 피를 흘리는 것을 아끼지 않았고 한미 혈맹의 우의를 다지게 한 한국의 은인인 것이다.
기사입력: 2005/09/12 [09:16]  최종편집: ⓒ 호남조은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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