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정희 대통령 서거 26주기를 기리며
농자천하 지대본의 교훈을 남기고 님은 가셨나이다
 
김동문 주필


오늘은 박정희 대통령 서거 26주기를 맞는 날이다.
 
1979년 10월 26일 비명에 서거한 고 박정희 대통령께 최규하 권한대행이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을 영전에 바친지도 어언 사반세기가 지났다. 농부의 아들로 태어나 "한강의 기적"이란 신화를 남기고 간 박정희는 26년이 흐른 지금도 국민들의 마음속에 살아있어 1978년 9월, 농도 전남에서 있었던 농민사랑의 일화 한토막을 회고한다.  

우연의 일치일까, 참여정부에서 잠시 대통령 권한대행을 수행했던 고건 전총리가 최연소(37세)로 전남지사로 재임하던 1978년 9월, 청와대가 들썩거린 사건이 벌어졌다.이른바 "노풍벼 파동"이다.  "노풍벼"는 다수확 품종인 통일벼 신품종 볍씨의 명칭이다. 
 
70년대 중반 부터 시작된 경제계획 5개년차, 식량 자급 자족 만을 주창한 박 대통령이 "녹색 혁명의 기적"을 이룬 신품종 볍씨를 개발한 이리(익산)작목 시험장장 박노풍의 이름자를 붙혀 "노풍벼"로 명명했다. 
 
당시는 농민들이 재배했던 일반볍씨는 단보당 450kg을 생산하는데 비해 박노풍이 개발한 신품종 볍씨는 750kg을 생산 한다는 농림부장관의 보고를 받은 박 대통령은 "기적의볍씨"를 손에쥐고 "노풍벼 만세"를 외쳤다 한다.
    
기적의볍씨 노풍벼의 탄생으로 정부는 전국 농가에 보급, 권장이 한창일 무렵당시,  고건지사를 가리켜 논두렁 도지사 라는 별호가 있었다..1978년 9월 농촌 들녁이 누렇케 황금색으로 바뀔무렵 필자는 영산강평야 00면 외딴 마을, 어느 농부의 부음을 전해들었다. 
 
한 농부가 수(임대)를 낸 2천평의 논에 정부의 권장으로 기적의 볍씨라는  노풍벼를 재배 했는데 수확기에 접어 병충해(목도열병)로 농사를 망치자, 폐농을 비관, 스스로 목숨을 끊는사건이 있었다. 
 
1978년 9월 8일자,전남매일 신문은 짤막한 농민의 부음 기사로 " 노풍벼 폐농에 농민 비관 자살" 농약 마시고 논두렁에서 숨져" (80년11월.통폐합조치로 폐간된 신문사)의 기사를 실었다. 
 
이틀후 00기관에 연행된 필자에게 쒸워진 죄목은 국가보안법을 적용한"이적행위"다. 왜? 폐농을 비관, 음독한 농민의 주검이 이적행위 일까? 국가 보안법, 처벌 규정은 북괴를 이롭게한 행위를 두고 이적 행위로 간주 처벌 한다는 것이다

농민의 부음 소식과 함께 이를 퍼날린 중앙지 기자들의 발빠른 취재 경쟁으로 서울에 전송. 되자 다음날 새벽 평양의 중앙 통신 대남 방송이" 남조선 박정희 군사 도당이 농민들을 학살하고 있다" 뉴스를 박정희 대통령이 직접 들었다는 것과 이날 국무위원 회의가 중단되고 서울 시내에 배포된 신문들을 수거하는 일이 벌어졌다고 필자를 연행한 고위 경찰 간부가 귀뜸해 주었다.
 
평양 중앙통신의 대남공작 방송의 소용 돌이 속에 당시 농림부 장덕진 장관은 "노풍벼" 권장 재배의 책임을 지고 한달만에 장관직을 떠났고 박 대통령의 특별지시로 보상, 피해 규모에 따라 전 농가에 현금 보상과 수매 보상, 농민 부채 ,이자 경감.등 건국 이후 처음으로 인재에의한 정부의 책임에 따라 1백 50여 억원에 달하는 보상금을 지급했다. 
 
필자는 오늘 박 대통령 서거 26주기를 추모하며 26년전 농민 참사랑을 실천한 박 대통령의 그림자가 새삼 크게 보이는 오늘<기자가본> 역사의 현장"   광복 에서 제 4공화국 까지..역사의 기록을 들쳐본다.
 
기사입력: 2005/10/26 [09:47]  최종편집: ⓒ 호남조은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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