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머니의 딸 1
본 연재물은 전남대학교 명예교수이신 저자의 승인하에 그 내용을 연재함
 
편집부


                                책머리에

낳아서 길러주시고 가르쳐 주신 그리고 평생 기도로서 지켜주시다가 2004년 7월28일 유명을 달리하신 나의 어머니의 일주기를 기해 어머니 생전에 다 하지 못한 사랑과 공경을 이 책에 담아 바칩니다.

평소에 늘 다른 사람보다 조금 더 나은 형편이면 그러지 못한 사람들을 돌보며 살아야 한다면서 우리 모두는 한 형제다 라고 말씀하셨으니, 눈감기 작전까지 기도하며 떠나셨기에 그 유지를 끝까지 받들며 살아갈 다짐과 함께 사랑하는 어머니께 바치는 바입니다.
 
 
                              어머니의 딸에 붙여 (1)

이 책을 쓴 김정희 선생은 20세기 한국에서 태어나서 대동아전쟁, 6.25사변을 몸소 체험하면서 살아왔다.

한국의 20세기 후반 격동기를 살아오면서 좋은세상,밝은세상에 대한 큰 꿈을 펼쳤던 것으로 안다. 평소에 펼쳤던 꿈이 아마 어머니의 딸 이란 책을 펴게 된 동기가 되었을 것이다.
 
한국이란 존재가 세상에 잘 알려지지 않았을때 필자는 서구 대학에서 명성이 높은 신학자 요셉 라칭거 교수님(현 교황 성하베네딕토 16세)의 문하생으로 입문하여 신학을 탐구하였다.

당시 서구사회도 양극화되어가는 진보나 보수의 입장들 때문에 공의회의 개최를 요청하고 있었던 만큼,요셉 라칭거 교수님은 독일 여러대학에서 끖는 전진을 앞세우는 진보 노선이든 고집 스럽게 보수를 주장하는 수구守舊노선이든 그 두 입장을 직시하고 품어 안으시는 그분께서는 결코 그 자리에 안주하지 않고 공의회가 던진 가톨릭시즘에 대한 생각을 균형잡힌 판단을 통해 미래의 근본 동기로 제시하면서 늘 중용의 길을 시도하였다.

한국 교회는 그분의 지성과 지혜를 배우고 돌아온 그녀에게 강단 자리를 주지 못했지만, 그러나 그녀는 좌절하지 않고, 때가 아직 되지 않았음을 받이드리고 그녀를 불러준 전남대학에 몸 담았다.

80년대 광주!
 
아직도 세월을 무색하게 할만큼 그 한을 씻어내지 못하고 있는 광주 전남대학교에서 교육자로서만이 아니라여성으로서 겪으며 살아온 구구 절절한 한국인의 아픔과 기쁨, 또한 우리들 모두가 거듭나야할 점들을 예리한 통찰력으로 지적하고 있는 이 책은 어쩌면 우리에게 이 시대의 진솔한 채근담을 들려주고 있다.

또한 어머니에 대한 효심이 남달랐다면 그것은 어머니이 조건없는 사랑과 희생이 뒷받침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그 어머니에 그 딸이 아닌가!

그 어머니는 전쟁 미망인이 되어 6남매를 혼자의 힘으로 먹이고 가르치고 길러냈다. 그뿐이랴!종이박사 로 돌아온 딸을 인간 박사 되어라 고 무던히 채찍질 하였다.

돌아 가시기 직전까지 ?밥 한그릇 먹을 처지면 어렵고 힘든 사람들을 보살피고 돌보며 살라?고 유언 하셨다. 그리고 딸의 마지막 생일상까지 차려놓고 2004년 7월28일 유명을 달리 하셨다.

그 어머니를 그리면서 그 애환을 기다림으로 승화시키고 있는 딸의 모습이 애절하다.

14년이란 장기간동안 서구에서 보내면서 그곳의 사상과 학문, 문화와 전통을 탐색하였기 때문에 이 책은 동 서양의 문화 비교를 통해서 오늘의 빗나간 문화를 날카롭게 설파하기도 했다.

또한 가톨릭 신자로서 영성차원에서, 신학적 탐구가로서 신앙과 이성의 두 날개를 달고 진리를 탐구한 흔적이 너무나 명확하다.

그뿐만 아니다. 우리나라 대학가의 선진화를 위한 조언들 또한 정확하다. 모든 아픔들을 우리 주 그리스도의 수난 안에서 받으며 성화되어가는 면모들 역시 지성인들에게 큰 귀범이 된다.
 
아무쪼록 이 책이 여러사람들에게 널리 전달되어 우리 사회의 구성원 모두가 인간의 기본질서를, 공동선을, 평화를 추구하는데 크게 기여되기 바라며,믿는 이들만이 아니라 믿지 않는 모든 이들의 가정에 주님의 평화와 축복이 늘 가득하기를 빈다 

                                                                                                    2005. 5. 24 
                                                                                           추기경 김 수 환
 
                                   어머니의 딸에 붙여 (2) 
 
필자는 한국에서 생물학을 전공하고 프랑스로 건너갔다.

그리고 어느 분의 권유로 철학과 신학을 공부하기 위해 독일 레겐스부르크로 옮겼다. 13세기에 레겐스부르크에 자리한 도미니쿠스 수도원은 자연과학과 철학을 가르쳤으며, 그 곳에 한동안 토마스 아퀴나스의 스승 알베투스 마구누스가 머물렀던 곳으로 그 자리에 지금의 레겐스부르크 신학대학이 세워지게 되었다.

그런 연유로 레겐스부르크 신학대학은 정신적인 학문분야에서 가장 매력을 풍기는 요체로서 우뚝 서게 되었고 바로 그 요체의 중심에 요셉 라칭고 교수가 서 있었다. 그 당시 요셉 라칭거 교수님에게 신학을 배우기 위해 독일어 문화권에서만이 아니라, 다른 유럽나라들 그리고 북미와 남미, 아시아와 아프리키에서 레겐스부르크 신학대학으로 모여 들었다.

요셉 라칭거 교수님은 1969년 가을 학기 레겐스부르크 대학으로 오시기 전 그의 젊은시절 본 대학에서 기초 신학을 가르치면서 인도학자 폴 하크와 함께 종교학의 완벽한 만남을 끌어냈다.

무었보다 요셉 라칭거 교수님은 아우구스티누스 학문, 종교, 철학 그리고 그리스도적 신앙과의 관계를 포괄하였다.

그는 제2차 바티칸 공의회(1962-1965) 조언자로 부름을 받았으며, 또한 뮌스터-튀빙겐 대학에서 교의신학을 가르쳤다. 그러는 동안에 그는 곧 바로 가톨릭교회의 탁월한 신학자의 일인자로 인정을 받게 되었다.

필자는 그 분의 명성을 익히 알고 레겐스부르크에서 신학을 공부하려고 결심했다.  다른 사람들 거의가 신학공부를 어렵다고 생각했던 것처럼 필자에게도 예외일수는 없었다.

특히 신학 공부를 하기 위해서 그것과 연관된 외래어를 배워야만 했다. 아직 독일어도 변변치 못한데다 그 변변치 못한 독일어로 라틴어, 희랍어를 배워야만 했다. 하여 필자는 궁극적으로 신학공부를 한층 더 깊이 탐구 해야만 할 것인가에 대한 회의를 갖지 않을수 없었다.

그래서 필자는 정치신학의 영역에 관한 주제에 관심과 매력을 갖게 되었고 또 그것을 탐구하려고 생각했기에 라칭거 교수의 문하생에 소속되는 요청을 망설이고 있었다.

때 마침 필자에게 소중한 조언을 아끼지 않았던 두명의 라칭거 제자가 있었다. 라칭거 교수님의 지도하에 박사논문을 쓰도록 필자에게 용기를 주었던 두 사람 가운데 한 사람이 바로 말틴 트림퍼(독일 오스나부르크 교구 사제이심)이었고, 또 한사람은 그 당시 스위스 프리부르크 대학 교수직에 부름을 받았던 크리스토프 폰 쉔보른(지금 비엔나의 대 교구장이며 추기경이심)이었다.

뿐만 아니라 쉔보른은 필자에게 대 중세 철학자이며 신학자인 아퀴나스(알베르트 마그누스의 제자)를 탐구하도록 권유했다. 쉔보른의 권유에 힘입은 필자는 상호 문화적 만남을 위한 윤리의 확산을 박사논문 주제로 선택하여 탐구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공자의 중심개념 인仁 과 관련하여 토마스 폴 아퀴나스의 카리타스caritas (프랑크푸르트1984)를 필자의 박사논눔테마로 정했다.

쉔보른 교수는 스위스 프르부르크에서 한 학기동안 토마스 폰 아퀴나스의 윤리를 작업할수 있도록 언어를 도와 주었다.

요셉 라칭거 교수님 자신은 제자들의 논문을 보살피기 위한 작업을 특별하게 메 학기마다 2주 아니면 3주 과정으로 박사과정 콜로키움 형식을 통해서 토요일 오전에 실시하였다,

성찬 전례가 끝나면 제자들 가운데 한 사람이 자신의 박사논제 일부분을 발표하였고, 발표를 마치면 제자들 상호간에 토론하게 하였다.

라칭거 교수님의 지도아래 그러한 일련의 과정은 다른 유명한 교수들과도 제자공동체를 위한 학문적이고 영적인 만남으로 아루어 졌다.

요셉 라칭거 추기경님의 70세 되던 해에 하인릿히 슐리어, 발터 카스파 그리고 칼 라너, 그 외 다른 개신교 신학자들 판넨 부르크와 말틴 행겔을 초대하여 담론을 펼쳤다.

레겐부르크 시절에 라칭거 제자 공동체에 소속된 개방적인 영적 우정의 관계를 필자가 맺을수 없었다면 아마 필자의 신학공부는 미완성으로 남았을지도 모른다.

최종적으로 필자는 그 길을 슈발츠 발트에 있는 작은 가톨릭 학술원에서 발견하였다.

여름 방학동안 슈발츠 발트 가톨릭 학술원에서는 철학교수들과 신학교수들, 학생들과 그것에 관심을 갖는 사람들에게 개방되어진 가족적인 방식의 만남을 통해서 강의들을 듣고 토론하며, 또한 서로에게서 삶을 배우고 또 서로에게 정신적,영적으로 배려하게 되는 그런 우정의 만남들을 갖게 되었고 그리고 그 삶을 레겐스부르크에서 입증하게 되었다.

그들은 대학과 병행하여 많은 신학적 영적 대화를 이끌었고 또한 거의 부족함이 없이 그러한 공부를 위한 비판적인 순간에 함께 있었고 그리고 서로 서로 격려하면서 그 길을 갈수 있도록 도와주는 삶의 공간을 만들어 갔다.

필자에게는 이 모든 것이 점진적으로 새로운 고향, 즉 새로운 문화적 근거를 의미하였다.

레겐스부르크는 필자에게 이미 고향이나 다름 없었지만 그러나 한국의 고향에로 되돌아 가야 한다는 확고한 신념과 과제가 주어져 있었다.

필자 자신의 심원한 한국문화의 뿌리에다 독일에서 배운 그리스도적 신앙에 근거한 윤리와 문화 그리고 한국의 전통문화 세계사이의 징검다리 역할을 하기위해 한국에서 특히 광주에서 이러한 노고와 결실과 만남이 필자 자신의 모든 확문생활을 통해서 명백하게 드러났다.

필자는 학생들을 위한 자신들의 노력만이 아니라 종교문화 연구소를 창설하고 또 종교와 문화의 잡지를 만들어 내기까지 전력을 쏟았다.

요셉 라칭거 추기경의 제자 공동체는 오늘에 이르기까지 스승님과 함께 거의 매년 학문적,영적 교류를 위한 만남을 가졎다.

또한 제자 공동체는 요셉 라칭거 추기경인의 75세 생신을 축하하기 위해 2002년 4월 로마에서  communio  주제로 심포지움을 개최하였다.

그 자리에 필자는 우리에게 한국 종교들 안에 윤리의 근거 라는 발제문을 통해서 문화들의 상호결실의 가능성을 제시하였다. 

                                                                                                2005.  4.  30 
                                                                           제자 공동체를 대표해서 
                                                                                      스테판 호른  교수


1. 유 년 시 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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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주羅州와 전주全州를 일컬어 전라도全羅道라 부른다.

금성산錦城山과 영산강靈山江이 흐르는 나주는 천년 목사牧俟골로 알려진곳, 목사골이라는 이름만큼이나 나주는 비단처럼 아름답게 느껴지지만 그 역사적 운명은 불의에 도전하는 생명력을 지니고 있는 곳이다.

그 목사골에서 나는 1938년 10월30일 자정이 조금 넘은 시간에 아버지 김민호金旻浩와 어머니 강아지姜俄只의 4남 2녀 가운데 둘채딸로 세상에 태어났다.

 아버지는 약제 건제사업을 하시면서 직접 한약방을 경영 하셨다.

나의아버지(1895-1950)는 맏이가 아닌 둘째임에도 불구하고 일찍이 부친을 잃고 홀로 되신 할머님을 모시고 집안의 기둥역할을 해 오셨다.

18년 연상의 아버지와 부부인연을 맺을 수밖에 없었던 나의 어머니는(1912-2004) 장녀로 태어나서 외조부님의 각별한 사랑을 받으며 성장하셨다.

어머니는 외조부님 곁에서 한문을 깨우쳤고, 초등학교에서 한글을 배우셨다.
초등학교를 마친 뒤 외조부님 몰래 미국 선교사들이 경영한 광주 수피아 여성교양 양성소에 지망했는데 나중에 발각되어 끝내 배움을 지속할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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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때부터 결혼하게 될 때까지 배움에 대한 열망을 가슴에 묻고 살아 오셨고 집 안에 묶인채 여성의 덕목과 산림을 배우셨다.

결혼한 후 어머니는 시가의 대가족재도에서 고된 시집살이를 운명으로 받아들이며 한많은 세월을 살아 오셨다.

부모님의 혼례는 본인들의 뜻과는 무관하게 양가 어른들간의 약속으로 맺었다. 어머니와 아버님의 만남은 당사자들의 의향보다는 법과 제도에 의한 만남이었다.

가장역할을 하느라 노총각 신세를 면할수 없었다는 한 남자의 처지를 전해듣고 측은지심을 느꼈던 여성이 바로 나의 어머니셨다.

 아버지와의 만남을 자신의 필연적인 운명으로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던 이유는 한 스님의 사주풀이로 기인 되었다. 어머니는 태어날 때부터 몸이 허약 하셨다고 한다.

하여 외할아버지는 나이많은 남자에게 시집보내야 딸의 생명이 지속될수 있다는 스님의 말 한마디에 딸을 살려야 한다며 노총각을 사위로 선택 하셨다.

 어머니의 운명은 그렇게 스님의 말 한마디로 결정 되었던 만큼 딸의 생명을 연장시키고 싶었던 외조부님의 애절한 뜻이 담겨있다.

 그러니까 아버지와 어머니의 인연은 선택이 아닌 운명적인 만남이라고 할까? 지난날 우리부모들은 이런 문화구조 속에서 원망도 푸념도 하지 않고 주어지니 상황에 무조건 순응하며 의무라 여기며 말없이 살아오셨다.

결혼하기 전부터 아버지는 일찍 홀로되신 할머니를 봉양하고 형제들과 조카들을 보살피며 가장의 역할을 해내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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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는 항상 형제들에게는 좋은 형님이고 조카들에게 자애로운 아버지로 가문의 대부역할을 하셨다.

아침이 되면 형제들의 집을 두루 살피는게 일과며, 쌀통에 쌀이 있는가, 땔감이 있는가 그리고 조카자식들의 신발이 망가지지는 않았는가를 집집마다 하나 하나 챙기셨다.

그 뿐만이 아니다. 자기 자식들의 신발은 망가져도 모른척하고 조카들의 신발을 먼저 챙겨 아무도 모르게 그집 토방에 놓아두었던 다정 다감한 대가족의 대부셨다.

그러한 나의 아버지를 김씨 삼현파三賢派가문에서는 효자라는 칭호를 달아 주었다(1) 시집온 그 날로 나의 어머니는 그러한 남편을 내조하며 시어머니 모시고 동기간에 우애하며 첫채도 가정화목, 둘채도 가정화목을 가훈으로 받들고 살아 오셨다.

대가족 제도아래 깐깐하신 홀시어머니 봉양하며 아버지 형제분들 그리고 부모잃은 조카들을 보살피고 돌보면서 말도 많은 고된 시집살이를 하느라고 가슴에는 파란 멍이 들었지만 시댁의 식구중 누구 한 사람도 어마니 멍든 가슴을 어루만져 주는 이는 없었다.

시댁의 문화 환경에 적응 될 때까지 귀막고, 눈감고, 벙어리 석삼년만 잘참고 견디어 낸다면 어느 날은 그 고되던 시집살이도 서광은 비치겠지 기대 반 ,회의 반 하면서 헌신적으로 살아 오셨는데 어찌된 일인지 시집살이는 풀리지 않고 세월이 가면 갈수록 더욱 힘들고 고달프기만 했다.

(1) 김해김씨삼현처사공계세보전金海金氏三賢處士公系世譜全광주 사경제,2004.83-84쪽과 103쪽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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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여자는 시집가면 그 시가의 귀신이 되어야 한다 는 외조부님의 준엄한 말씀을 지키려다가 끝내는 친정 부모님의 장례식에도 참여할수 없었던 한을 가슴에 품고 살아 오셨다.

하여 어머니는 자신의 죽음을 눈앞에 두었던 90의 나이에도 부모님 생전에 다하지 못한 죄책감 때문에 심히 괴로워 하셨다. 물론 나의어머니도 고달픈 시집살이 에서 탈출하려고 나름대로 부단한 몸부림을 치셨고 또 그시절에도 이혼까지 생각한적이 있다고 하셨다.

그러나 자식들 때문에  또 가문에 누를 끼치게 되면 어쩌나 하는 우려와 걱정 때문에 끝내 참고 견디면서 그 힘들고 고달프기만한 시집살이를 굳세게 살았다고 한을 털어 놓으셨다.

참고 살았던 그 세월만큼이나 어머니의 가슴속에 멍이 깊은 한의 불씨가 남아 있었지만 끝내 어머니의 삶은 자식들을 위해서 또 가문의 영광을 위해서 다만 그 한을 태우지 못한채 희생 그 자체로 남았다

나의 어머니는 가문과 자식들을 위해서라면 자신의 모든 것을 다 버렸고, 다 바치셨다.

사실 그 시대의 모든 어머니들의 삶이 다 그러했듯이 나의 어머니의 삶도 예외는 아니었다

사실 어머니란 삶과 죽음의 열쇠를 쥐고 있는 존재이다.

그 때문에 여성은 약하지만 모든 어머니의 존재는 강하다.

그래서 여성의 주권이 먼저 가정과 사회 안에서 인정되어야 하고, 인정 될때야 비로서 여성의 존재가 인정될수 있다.

여성의 존재가 발휘되어야만 가정도 사회도 국가도 평화로울수 있다.

우리 어머니 시대에는 가정과 사회안에서 여성의 존재가 발휘될수 없었기에 그만큼 여성의 지위가 향상 될수 없었다.

                                                                                                                     <1회 끝>
 
 
 
 
 
 

 
기사입력: 2005/10/28 [08:48]  최종편집: ⓒ 호남조은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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