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통 놀이들을 그리워하며
잊혀져가는 전통놀이문화
 
안희환 기자


 
요즘 아이들을 보면 인터넷과 게임에 빠져있는 것을 보게 된다. 그 정도는 심각한 수준이어서 중독된 상태의 아이들을 많이 볼 수 있는데 여러 가지 좋지 못한 영향을 미치고 있음을 보게 된다. 대인관계의 단절은 물론이고 앉아있는 시간이 너무 많아지므로 체력의 저하 현상까지 가져오고 있다.

실제로 아이들의 체격은 이전에 비해 훨씬 커졌지만 체력은 현저하게 떨어진 상태이다. 더구나 소아 비만은 어느덧 보편적인 현상으로 자리잡아가고 있으며 아이들 역시 다이어트를 시켜야 하는 상황에 이르고 있다. 이런 것들을 보면 오히려 현대의 놀이문화보다 전통적인 놀이문화가 사람에게 유익했었다는 생각이 든다.

지금처럼 컴퓨터가 보편화되지 않았던 시대에는 야외에서 하는 놀이가 주를 이루었으며 앉아있기 보다는 활동하는 일들이 많았기 때문에 건강에도 도움이 되었었다. 당연히 체력도 좋아졌고 정신건강이라는 측면에서도 훨씬 유익했다. 물론 요즘 아이들에게는 생소한 놀이겠지만 말이다. 그 전통적인 놀이문화가 아예 사라지지는 않을까 하고 염려되는 마음에 그 몇 가지를 간략히 소개해 보려고 한다.


1. 그네뛰기

우리나라의 경우 그네뛰기에 대한 기록은 [고려사]에 처음 나온다. 고려시대의 단오절에 그네뛰기가 성행했으니 그네뛰기는 상당히 오래된 민속놀이인 셈이다. 사실 그때에는 그네뛰기가 서민들의 문화는 아니었다. 왕궁에서 혹은 귀족들의 사회에서나 즐기던 놀이였던 것이다.

그러한 그네뛰기가 서민들에게도 옮겨간 것은 조선시대의 일이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조선시대는 양반문화가 강한 시대인지라 점잖은 귀부인들이 야외에 나가서 그네를 뛴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한 일이었고, 반대로 서민층 부녀자들은 사람들 눈치를 볼 필요가 없기 때문에 그네뛰기를 즐길 수 있었던 것이다.

물론 요즘에도 놀이터마다 그네가 있고 공원이나 학교에도 그네가 있다. 그러나 어릴 때 우리가 놀던 식으로 발을 굴러가며 온 몸이 땀이 날만큼 그네를 뛰는 아이들은 찾아보기가 어렵다. 살짝 엉덩이를 걸치고 그네를 타거나 뒤에서 누군가 밀어주는 경우를 많이 보는 것이다. 아무튼 다행인 것은 그네를 곳곳에서 볼 수 있다는 점이다.


2. 쥐불놀이

 
쥐불놀이는 정월대보름의 전날에 농촌에서 많이 행해지던 놀이이다. 나도 어릴 때 쥐불놀이를 하면서 즐거워하던 기억이 있다. 깡통을 주워온 다음 못으로 구멍을 송송 뚫고 그 깡통에 양쪽 끄트머리에 뚫은 구멍엔 긴 철사 줄을 매단다. 깡통 안에는 불씨가 남아있는 나뭇가지를 담고 철사를 잡은 채 빙빙 돌린다.

농촌에서 쥐불놀이를 하던 데에는 몇 가지 이유가 있었다. 첫째는 논밭에 많은 쥐들이 서식하고 있었는데 그 쥐들을 쫓아버리는 것이다. 둘째는 겨울철 논밭에 온기를 가함으로써 새싹들이 잘 자랄 수 있도록 하려는 의도에서였다. 셋째는 논밭의 마른 풀들에 붙어있는 해충들의 알과 유충들을 제거하는데 그 의의가 있었다.

요즘은 쥐불놀이를 할 공간이 전혀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아파트 단지 내에서 불붙은 깡통을 들고 다니다가는 경비원에게 당장 빼앗겨버릴 것이고 부모에게도 혼구멍이 나고 말 것이다. 그렇다고 농촌에서 쥐불놀이가 행해지고 있는 것도 아니다. 그러고 보면 점차 사라지고 있는 쥐불놀이인 셈이다. 아쉽다. 정말 재미있는 놀이인데...


3. 널뛰기


 널뛰기는 단오나 한가위 때 주로 부녀자들이 즐기던 놀이이다. 기다란 널판과 널판 밑에 놓을 수 있는 가마니 혹은 짚단만 있어도 즐길 수 있는 간단한 놀이이기 때문에 전국적으로 넓게 퍼져있었다. 양쪽 끝에 한 사람씩 있어서 한 사람이 뛰면 그 반동으로 반대쪽 사람이 뛰어오르는 놀이로써 운동이 많이 되는 놀이이다.

널뛰기의 정확한 기원은 알 수가 없다. 다만 유교 사회에서 함부로 바깥나들이를 할 수 없었기에 널뛰기를 통해 바깥을 내다볼 수 있었다고 하는 이야기가 널리 알려져 있다. 호기심이 왕성한데 반해 출입이 너무 통제되는 상황에서 잠시라도 담장 밖을 내다볼 수 있다는 것은 큰 즐거움이었을 것이다.

나 역시 널뛰기를 많이 해보았는데 문제는 튼튼한 널판을 구하는 것이 쉽지 않다는 점이었다. 남자 아이들은 여자 아이들과 달리 있는 힘을 다해 널을 뛰었는데 여간한 널판도 몇 차례 널을 뛰고 나면 금이 가고 말았다. 금간 널판 위에서 널을 뛰어 결국은 다 부러뜨리고 말았지만 말이다.


4. 팽이치기


 팽이는 지역마다 각기 다른 명칭을 가지고 있다. 팽이라는 말은 서울, 경기, 충청 지역에서 많이 쓰이던 용어이고, 경남지방에서는 뺑이라 불렀다. 경북에서는 핑딩, 전남에서는 팽돌이, 제주도에서는 도래기라고 불렀다. 지금은 텔레비전의 보급으로 표준어가 널리 쓰이고 있기에 팽이라는 말로 통일되는 상황이다.

요즘에도 팽이는 많이 있다. 내 아들도 여러 개의 팽이를 가지고 있는데 문제는 그 팽이가 어릴 때 우리가 가지고 놀던 팽이와는 전혀 다르다고 하는 것이다. 즉 줄을 감고 내리 던져서 팽이를 돌리는 것이 아니라 기계식으로 된 팽이라서 간단히 짧은 줄을 잡아당기거나 단추를 누르면 팽이가 돌아가는 것이다.

물론 편리한 점이 있는데 그것은 실내에서 할 수 있는 팽이라는 점이다. 그러나 야외에서 아이들과 더불어 땅에 내리 꽂던 팽이치기와 달리 운동이 전혀 되지 않는 팽이라서 별로 마음에 들지 않는다. 가뜩이나 많은 공기와 운동량이 모자란 아이들에게 놀이문화조차도 실내로만 파고들게 하니 세상이 많이 달라진 모양이다.


5. 딱지치기

 
딱지치기는 정말 많이 퍼졌던 놀이인데 언제 어디에서나 딱지치기를 할 수 있다는 이유에서일 것이다. 종이로 딱지를 접는 방법에 따라, 어떤 종이로 딱지를 접느냐에 따라, 얼마나 기술적으로 상대의 딱지를 때리느냐에 따라 딱지치기의 승패가 갈렸는데 상대의 딱지를 따려고 혈안이 되었었다.

종이가 넉넉하지 않았기 때문에 귀한 상장을 엄마 몰래 가져다가 딱지를 접은 기억이 있다. 어디에선가 좋은 잡지를 얻어오면 잡지 중에서 칼라로 된 두꺼운 부분을 뜯어다가 딱지를 만든 기억도 있다. 한참 딱지치기를 하면 다음날 팔이 뻐근하지만 그래도 또 다시 딱지를 들고 나오는 아이들의 모습을 많이 볼 수 있었다.

요즘도 딱지치기가 있기는 하다. 그러나 요즘 아이들은 이미 인쇄된 상태로 나오는데다가 접는 선까지 자국이 나있는 딱지를 돈으로 사다가 딱지치기를 한다. 내 아들 효빈이에게 달력으로 딱지를 만들어 주었더니 신나서 가지고 나갔다가 시무룩해져서 집에 돌아왔다. 다른 아이들이 취급을 안해준다는 것이다.

시대 따라 가치관도 달라지고 문화도 변화를 경험하며 그 과정에서 놀이문화도 전과 다르게 변할 수 있다는 것을 인정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과거의 놀이 문화를 그리워한다는 것은 나도 어느새 기성세대가 되었다는 의미하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이전의 놀이문화가 육신건강, 정신건강에 더 유익했다고 하는 것은 누구도 부인하지 못하리라 생각한다.

뭐 요즘 아이들에게 전통 놀이를 강요하는 것은 부질없는 일이겠지만 그래도 몇 번쯤은 접하게 해주고 싶은 마음이 있다. 정 안되면 내 아이들에게만이라도...
기사입력: 2005/11/05 [11:03]  최종편집: ⓒ 호남조은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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