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성 연쇄살인사건, 공소시효 지나 새 국면
지난 12일 공소시효 지나. 영구 미제사건으로 남을 듯
 
유명조 기자

▲ 경찰청 자료사진   


영화 살인의 추억으로 잘 알려진 화성연쇄살인사건의 범인이 앞으로 검거되더라도 어제 공소시효가 만료됨에 따라 법의 심판을 받을 수 없게 됐다.

바로 1990년 11월 15일 화성군 태안읍 능리 김○○ 양은 성폭행을 당한 뒤 살해되는 사건이 발생한지 15년이 지나 영원한 미제사건으로 빠지게 되었고, 범인들은 이제 자유의 몸이 된 것이다.

화성연쇄살인사건은 1980년대 경기도 화성 일대에서 연쇄적으로 벌어진 살인 사건으로1986년 9월부터 1991년 4월까지 화성에서 10명이 희생된 사건이다.

10차 사건의 범인은 정액·체모 조사 결과 9차 사건의 범인과 DNA가 다른 것으로 나타나 진짜 화성연쇄살인사건의 범행은 9차까지로 보고 있다.

1991년 4월 3일 발생한 10차 사건은 사건 발생 직후부터 수사진이 모방 범죄일 가능성이 높다고 봐 왔으나 뚜렷한 범인 윤곽을 찾아내기 못한 채 10차 사건도 내년 4월 2일이면 공소 시효가 만료되는 등 화성연쇄살인사건은 말 그대로 영원히 풀리지 않은 사건이자 잡히지 않은 범죄자들로 기록될 것이다.

그러나 경찰은 이들의 검거에 손을 놓지 못한다. 이들의 사건기록만 해도 캐비냇 5개가 될 정도라고 한다.

비록 법정에는 세우지 못 하지만 경찰은 수사를 끝 까지 한다고 굳은 결심을 밝혀 현재 화성연쇄사일사건은 현재 진행형이다. 
 
▲ 당시 범인의 몽타주 모습/경찰청 자료사진    ©충남 유명조


♣ 화성 연쇄 살인 사건이란

화성 사건은 피해자의 대상이 모두 여자라는 점, 피해자가 젊은 층에 한정되지 않고 52세(7차)·71세(1차) 등 다양하고, 피해자의 음부가 크게 훼손(4·6·7·9차)되고, 사건 현장이나 피해자의 음부에서 정액 또는 머리카락·담배꽁초 등이 발견되고, 대부분 목이 졸려 살해됐고, 범행 수법이 잔인하고 대범한 점이 특징으로 꼽힌다.

그간 경찰은 화성 사건의 범인을 검거하기 위해 연인원 180여만 명의 수사 인력을 동원하고 1만 8천여 명을 대상으로 용의자·참고인·증인 조사를 하는 등 경찰력을 집중해 왔다.

하지만, 8차(88년 9월16일) 사건만 사건발생 9개월여 만에 윤모(당시 22세)를 검거했고, 나머지 사건은 영구미제이다.

화성연쇄살인사건은 경찰이 연쇄 살인으로 추정한 것이지 실제 연쇄 살인인지도 밝혀지지 않은 것이다. 또, 7·9·10차 사건의 용의자로 지목된 3명의 용의자가 자살하는 불상사가 있기도 했다.

경찰은 공소 시효가 만료되더라도 경찰의 자존심이 걸린 문제로 간주해 끝까지 범인을 검거하려 하고 있다.

화성수사본부는 지난 1996년부터 수사본부장을 화성경찰서장으로 해 16명이 운영해오다 지금은 강력3반에서 수사형사 4명이 전담운영하고 있다.

한편, 지난해 10월에도 여대생 노○○(당시 21세) 씨가 화성지역에서 실종됐다 두 달여 뒤 숨진 채 발견되는 사건이 발생, 주민들을 불안에 떨게 한 바 있다.
 
다음은 화성연쇄살인사건을 종합적으로 정리했다. 
 
▲ 사건을 나열한 자료사진경찰청 자료사진    ©충남 유명조

1차사건 : 1986년 9월19일 오후 2시 이○○(당시 71세) 씨가 마을 앞목초 밭에서 목이 졸려 살해된 시체로 발견됐다. 실종 5일만이었고, 하의가 벗겨져 있었으나 별다른 폭행 흔적은 발견되지 않았다.

2차사건 : 1986년 10월23일 오후 2시50분 박○○(당시 25세) 씨가 태안읍 진안리 농수로에서 알몸의 시체로 발견됐다. 스타킹으로 목이 졸려 살해됐고, 강간 흔적이 남아있었다. 양손이 뒤로 묶인 채 하체에 심한 상처가 있는 상태로 사체가 농수로에서 알몸으로 발견되어 당시 큰 충격을 주었다.

3차사건 : 1986년 12월21일 낮 12시30분 이○○(당시 23세) 씨가 약혼자를 만나고 귀가하다가 관항천에서 스타킹으로 목졸린 채 시체로 발견됐다. 강간 흔적이 있고, 옷이 입혀진 상태에서 하체에 심한 상처가 있었다. 발견 일주일 전에 살해된 것으로 추정됐다. 범인은 그녀의 국부를 우산대로 난자한 뒤에 깻단, 짚더미 등으로 덮어 두어 시체가 여러 날이 지나서야 발견됐다. 이 씨는 후에 영혼결혼식을 올렸다.

4차사건 : 1987년 1월11일 오전 10시30분 홍○○(당시 18세, 고등학생) 씨가 병점읍 외곽을 흐르는 황구천 둑에서 피해자의 목도리로 목이 졸린 시체로 발견됐다. 양손은 스타킹과 브래지어로 뒤에서 묶여 있고 입에 재갈이 물려 있었다. 피해자 국부에서 B형 혈액형 검출됐고, 발견 전날 밤 8시30분쯤에 살해된 것으로 추정됐다. 4차 사건의 경우 사건 발생 12시간이 채 지나지 않았음에도 전혀 단서를 남기지 않아 지능범이라는 심증을 갖게 했다.

경찰은 이때부터 연쇄 살인 사건으로 보고 수사하기 시작했다.

5차사건 : 1987년 4월23일 오후 2시 권○○(당시 25세) 씨가 공장 옆의 울타리 넝쿨 밑에서 시체로 발견됐다. 양손이 묶인 채 하의가 벗겨져 있었고, 시체가 부패된 상태로 짐작해 몇 달 전에 살해된 것으로 추정됐다. 시체의 발견이 너무 늦어 현장에 떨어져 있던 도장과 피해자의 옷으로 겨우 피해자 신원을 확인했다.

6차사건 : 1987년 5월9일 오후 3시 박○○(당시 29세) 씨가 진안리 야산에서 하교하는 초등학교 학생들에 의해 시체로 발견됐다. 브래지어, 내의 블라우스로 각각 세 차례 목이 졸리고, 목 어깨 등에 돌로 찍은 듯한 상처가 시체에 남아 있었다. 팬티, 청바지는 입은 채였고, 강간 흔적은 없었다. 화성 연쇄 살인 사건은 이때부터 언론의 집중적인 관심을 받기 시작했다.

7차사건 : 1988년 9월8일 오전 9시 안○○(당시 54세) 씨가 블라우스로 목이 졸려 살해된 시체로 발견됐다. 양손이 뒤로 묶인 채 입에 재갈이 물려 있었고 강간 흔적이 있었다. 먹던 복숭아가 국부 안에서 발견돼 충격을 주었다. 이 사건은 목격자와 범인의 몽타주가 나왔음에도 범인을 검거하지 못했다.

8차사건 : 1988년 9월16일 오전 6시30분 박○○(당시 14세, 중학생) 양이 집에서 잠자다가 목이 졸려 살해된 시체로 발견됐다. 강간 흔적이 남아있었고, 남자의 체모가 발견돼 감정결과 B형 혈액형과 체모에서 티타늄원소가 분석됐다 .

티타늄원소는 용접공들이 많이 사용하는 용접봉에 함유되어 있기 때문에 용접할 때 용접공들의 인체로 들어가는 것으로 확인돼, 경찰은 화성 일대의 용접공들을 수사했다.
 
마침내 농기계수리공인 청년이 용의자로 지목됐고, 경찰은 용의자에게서 머리칼을 수거하여 감정을 의뢰했고, 범인의 체모에서 검출된 티타늄원소가 용의자의 머리카락에서도 발견됐다. 경찰은 용의자를 검거하고 자백을 받아냈다. 범인은 화성연쇄살인과는 관계가 없었고 사회적 이슈를 따라한 모방범죄로 드러났다.

9차사건 : 1990년 11월 16일 오전 9시 50분 김○○(당시 14세, 중학생) 양이 태안읍 병점5리 석재공장 뒤 야산에서 목이 졸려 숨진 채 발견됐다. 전날 하교 후 귀가하던 중 성폭행 당한 뒤 살해된 것으로 추정됐고, 범인의 정액검사결과 B형으로 추정됐다. 범인을 아는 제보자로부터 범인에 대해 제보편지가 왔었지만 범인 검거에 실패했다. 영화 살인의 추억의 소재가 된 사건이다.

10차사건 : 1991년 4월4일 오전 8시30분쯤 동탄면 반송리 599 야산에서 권○○(당시 69세) 씨가 하의가 벗겨지고 목이 스카프로 감긴 채 시체로 발견됐다. 발견당시 권씨는 하늘색 한복치마가 벗겨져 있었고 목에는 검은 스카프가 감겨있었으며 속옥은 벗겨진 상태였다. 범인은 정액·체모 조사 결과 9차 사건의 범인과 DNA가 다른 것으로 나타나 모방범죄로 추정됐다.

♣ 범인 왜 못 잡나?

화성연쇄살인사건은 팔탄면의 7차 사건을 제외하고는 모두 국도 1호선을 끼고 경기도 화성군 태안읍을 반경으로 3㎞ 이내에서 일어났다. 현재 이 사건 현장에는 대부분 아파트나 공장이 들어서 있다.

당시 수사를 맡았던 대부분의 경찰은 퇴직한 상태로 현재의 수사는 당시의 기록에 의존하고 있다.

목격자 진술 등을 토대로 한 범인은 키 168∼170㎝ 전후의 약간 마른 체격, 당시 25세 가량, 혈액형은 B형으로 추정된다는 수사보고 내용이 마지막이었다.

유일한 직접증거는 마지막 9·10차 사건현장 사체에서 체취한 범인의 것으로 추정되는 지문 몇개와 모발, 정액뿐이다.

이 사건을 계기로 국내에서는 처음으로 DNA분석기법이 동원되기도 했다.

경찰은 사건 해결을 위해 2계급 특진에 현상금 5천만 원까지 걸었지만 여전히 미제 상태로 남아있다.

이는 범인이 증거를 전혀 남기지 않는 등 주도면밀한 점도 있었지만, 사건 발생 초기 증거 보존 등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은 영향도 큰 것으로 나타나 경찰의 초기 조사에서 얼마나 허술했는지 보여주는 계기였다.

현재 수사형사 4명이 수사본부를 전담 운영중이지만, 이들의 업무는 국립과학수사연구소를 통해 연간 6천여 건에 이르는 성폭력 용의자의 DNA와 살인범의 정액에서 추출한 DNA를 대조하는 작업을 벌이는 정도에 그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사건 발생이 오래되면서 주민들의 제보도 거의 끊긴 상황이라 범인을 잡기는 쉽지 않아 보인다.
기사입력: 2005/11/15 [13:43]  최종편집: ⓒ 호남조은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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