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지 팥죽 단상
 
홍경석 기자

 저는 저의 생후 첫돌을 즈음하여 생모를 잃었습니다. 그로 인해 지금껏 역시도 생모의 얼굴을 그림으로조차도 그릴 줄 모르는 극명한 아픔을 마음 속 깊은 곳에 저장하며 살고 있습니다.

저는 할머니의 손에 의해 자라야 했지요. 하지만 말이 할머니지 실은 생모보다도 더한 가까움과 살가움을 느끼게 하는 분이 바로 할머니셨습니다. 낳은 정보다 기른 정이 우선한다는 실증적 사례가 바로 저의 경우였으니까 말입니다.

당시는 너 나 할 것 없이 모두가 참으로 어렵던 시절이었습니다. 그래서 팥죽은 오로지 동짓날이 되어야만 비로소 만들어 먹을 수 있었습니다. 당시 할머니께서는 동네의 이런저런 품앗이를 해 주시고 얼마 안 되는 돈 내지는 보리쌀 등의 곡식으로 받아오시는 날이 많았습니다.

동짓날은 일년 중에서 밤이 가장 길고 낮이 가장 짧은 날입니다. 그런데 제가 어렸을 적의 동짓날은 항상 그렇게 참으로 추웠습니다. 지금이야 보일러만 켜면 금세 방안이 훈훈해 지지만 당시엔 아궁이에 나뭇가지와 장작을 밀어 넣고 불을 지펴야 했습니다.

방안이 따뜻해지려면 매캐한 연기를 흠뻑 마셔가며 한참 동안이나 불을 때야만 했지요. 하루는 할머니께서 동짓날을 맞아 팥죽을 쑤신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신이 난 저는 동네방네를 돌아다니며 또래들에게 한껏 자랑을 했습니다.

"오늘 우리 할머니가 팥죽 쑨 댄다~" 그러자 평소 십리사탕을 즐겨 먹으면서도 하지만 제게는 단 한 개의 사탕도 안 주던 이웃의 얄미운 녀석 하나가 별안간 양순한 척 하며 아양을 떠는 것이었습니다.

"헤헤~ 니 힐머니가 팥죽을 쑨다고? 팥죽은 동치미랑 먹으면 그 맛이 최고지!" 하지만 저는 못내 얄미워서 다른 애들만 데리고 집으로 가는 것으로 그 녀석을 왕따 시켰습니다.

이윽고 김이 하얗게 하늘로 오르는 검은 무쇠솥을 열고 할머니께서 팥죽을 국자로 푸셨습니다. 그러자 제 뒤를 졸랑졸랑 따라왔던 녀석들의 입이 함지박만 해 졌습니다. 할머니께서는 "어이그, 거지발싸개 같은 놈들이 죄 몰려왔구먼." 하시면서도 흔쾌히 팥죽을 그릇 가득하게 퍼 주셨습니다.

우리들이 그 팥죽을 정신없이 먹고 있는데 제가 왕따시킨 녀석이 어느새 다가와 부엌문 뒤에서 제 눈치만 살살 보면서 입맛을 쩝쩝 다시는 것이었습니다. 순간 기고만장한 저는 "할머니, 쟤는 주지 말아요!"라고 했지요.

그러나 할머니께서는 "그럼 못 쓴다, 친구끼리는 다만 콩 한 쪽이라도 나눠먹어야 하는 법이여."라며 녀석에게도 수북하게 팥죽을 담아주셨습니다. 동국세시기에 의하면 동짓날은 작은 설의 대접을 했을 정도로 중요하게 여겼답니다.

그런 풍습은 오늘날에도 이어져 동짓날에는 팥죽을 먹어야 비로소 나이 한 살을 더 먹는다고 하여 가정은 물론이고 사찰에서도 팥죽 돌리는 광경을 많이 보게 되는 것입니다. 또한 동짓날이 되면 팥죽을 만들어 각 방과 장독, 헛간 등 집안의 여러 곳에 담아 놓았다가 식은 다음에 식구들이 모여서 먹곤 했습니다.

시절식(時節食)의 하나인 동짓날의 팥죽에는 신앙적인 뜻도 포함돼 있었기 때문이랍니다. 즉, 팥죽에는 귀신을 물리치는 기능이 있다고 생각해 집안 여러 곳에 해를 끼치는 잡신을 모조리 쫓아내기 위해 팥죽을 놓았다는 겁니다.

여류처럼 세월은 흘러 팥죽을 맛나게 쑤셨던 할머니는 진작에 작고하셨고 당시의 제 또래들도 저와 똑같이 이젠 지천명을 바라보는 중늙은이가 됐을 겁니다.

하지만 지금은 동짓날이 되어도 팥죽을 쑤는 집을 보기가 어려우며 설령 팥죽을 쑤었다손 치더라도 이웃에는 단 반 그릇조차도 구경을 안 시키니 에고이즘적인 작금의 세태가 못내 아쉽기만 합니다.

올해의 동짓날은 지난 12월 22일이었습니다. 
기사입력: 2005/12/30 [10:07]  최종편집: ⓒ 호남조은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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