테러리즘의 정치심리학
 
임동규 기자
1) 정치적 테러의 정의

우리나라에서는 정치적 테러가 절대적으로 배후를 밝혀 낼 수 없는 절대 권력의 비호 하에 정치적 반대자를 제거하는 수단으로 곡해되어 고착되다 시피 한 것 같다. 그것은 해방공간에서의 송 진우, 장덕수, 여운형 그리고 김 구 모두가 찬탁을 했던지 단선단정에 의한 분단을 반대해왔던 분들이고 당시의 국내외의 정세 상 한반도 전역에 걸친 친미정권의 건설이 어렵게 된 조건에서 분단 강점하고 가능한 지역에서 만이라도 친미정권을 세우려는 노력을 강행하기 위해서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본연의 정치 테러는 도리어 정치적 약자가 자신이나 소속 조직의 요구를 도저히 관철 시킬 수 없는 절망적 상태에서 최후적 수단으로 선택 하게 되는 폭력행위인 것이다. 오늘날 이라크 저항세력이나 팔레스타인들이 실지회복을 위한 자폭 행위들이 전형적인 정치적 테러 인 것이다.

2) 사기열전에 나오는 테러들

인류 최초의 역사서 (歷史書)라고 하는 사마 천 사기의 사기열전에는 자객 열전이 있어서 정치적 테러의 중국적 원형을 보여주고 있다.

1. 노(魯)나라의 조말 (曹沫)은 비수(匕首) 하나로 잃었던 땅을 되찾았다. 즉 조말 은 노나라의 장수로써 제(齊)나라와 싸워서 세 차례나 패배했기 때문에 노 장공(魯 莊公)이 두려움을 갖고 수읍(遂邑)의 땅을 바치고 화친하고자 하였고 제 환공 (齊桓公)은 가(柯)에서 회맹할 것을 허락 하였다. 환공과 장공이 단상에서 이미 회맹하고 있을 때 조 말이 비수를 집어 들고 환공을 겁탈 하여 실지를 모두 되돌려 받기로 약속을 받아내고 제 환공 역시 관중의 건의를 받아 겁탈 상태에서의 약속을 지켰다.

2. 전제 (專諸)라는 자는 오(吳)나라 공자 광(公子 光) 부탁으로 비수를 생선 속에 감추었다가 초대 잔치에 참가하기위해 찾아온 오 왕 요 (吳王 僚)를 찔러 죽여 공자 광이 오 왕이 되도록 하였다. 이가 오왕 합려(闔閭)이다. 합려 는 전제의 아들을 봉하여 상경(上卿)을 삼았는데 전형적인 은원관계 (恩怨關係)에 의한 정치 테러 행위로 간주된다.

3. 예양 (豫讓)이란 자는 진(晋)나라 사람으로 자신을 국사(國士)로 알아주었으나 이미 멸망당한 상전의 복수를 위해 조 양자(趙襄子)를 암살하려다가 도리 혀 채포되어 죽임을 면할 길이 없게 되었다. 그러나 조 양자는 예양이 의로운 사람이라 하여 석방해주는 도량을 베풀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양은 구차한 변장까지 해가면서 재복수의 기회를 노렸다. 차라리 관인 후덕한 조양자의 신하가 되어 기회를 엿보는 것이 실현 가능성이 높은 것 아니냐 하는 친구의 충고에도 불구하고 그는 “이미 신하의 예를 갖추고 섬기면서 죽이려 하는 것은 두마음을 품고 주군을 섬기는 것이다.
 
사실 내가 하려는 것은 그런 사람을 부끄럽게 하기 위함이라.” 하여 궂이 거절하고 건너야 할 다리 밑에 잠복하여 기회를 노리다가 도리 여 다시 붙들리게 되었다. 조 양자가 예양을 꾸짖어 말하기를 “그대는 전에 범씨 중행 씨를 섬기다가 그를 멸한 지백을 섬기게 되지 않았는가? 어찌하여 지백 만을 위하여 원수를 갚으려 하는가?” “저는 확실히 범씨 중행 씨를 섬긴 일이 있었지만 그들은 저를 범인으로 대우 했 습니다. 그래서 저도 범인으로 보답 했습니다.
 
그러나 지 백은 저를 국사(國士)로 대우 했습니다. 그래서 저는 국사로서 그에게 보답 해드리려는 것입니다.”라고 대답하였고 심지어 마지막 요구로서 조양자의 의복을 내려달라 하여 예양이 칼을 빼어 세 차례 뛰어 들면서 이것을 치고 “이것으로 지하에 잠든 지 백께 보고 드릴 수 있습니다.” 하고 드디어 칼에 엎드리어 자살했다. 물론 여기에는 예양의 의리와 조양자의 도량도 잘 나타나 있다.

4. 섭정(聶政) 이란 자는 지(軹) 심정 리 출신으로 살인하고 원수를 피하여 모친과 누이와 함께 제(齊)에 가서 도살 업으로 오랫동안 생활하고 있었다. 엄중 자(嚴仲子)는 한(韓)나라 재상 협 루(俠累)와 원수가 되어 보복할 자객을 구하러 여러 나라를 순방 하다가 제나라에 이르러 섭정을 만나보고 황금 백일(鎰 : 약38kg)로 섭정의 노모 의 장수를 축원 하고 정중한 교제를 청 하였다.
 
그러나 섭정은 이를 궂이 사양하고 노모의 공양에만 전념 하였다. 오랜 세월이 지나고 섭정의 노모가 별세하고 장례와 상복을 벗은 후 “나는 시정의 일개 속인일 뿐인데도 엄중 자는 제후의 경이나 재상의 신분으로 천리 길을 찾아와 교제해주었다. 노모는 천수를 누리고 돌아 가셨으니 이제 나는 나를 알아주는 이를 위해 일해 보겠다.” 고 자청하여 거기(車騎) 장사(壯士)들을 모두 사양하고 단독으로 한나라에 이르러 엄중한 경계를 따돌리고 협 루를 막 바로 찔러 죽이고 고함을 지르면서 수 십 인을 쳐 죽이고 자신도 상상할 수 없는 자해를 하고 죽었다. 한나라에서는 시체를 거두어 시장에 드러내놓고 현상금을 걸어 시원을 확 인하려 하였다. 섭정의 누이 섭 영(聶榮)이 천리 길을 멀다 하지 않고 한나라에 와서 시정인에게 전후사정을 알리고 하늘을 향하여 크게 소리 지르고 가슴이 터지도록 슬퍼하면서 섭정의 옆에서 죽음으로써 남매협객의 기개를 유감없이 발휘 하였다.

5. 형가(荊軻) 는 연(燕)나라 태자 단(丹)의 부탁을 받고 진 시황(秦始皇)을 시해 하려다 실패한 이야기가 자객 열전의 절정을 이루고 있다. 우선 그 준비과정에서 진나라에서 망명한 번 어기(樊於期 : 천근의 황금과 일 만호의 식읍으로 현상금이 걸림)의 목을 자진 헌납 받고 자신이 기다리던 수행원이 아닌 태자 단이 추천한 진 무양(秦舞養)을 대동하고 출발할 수밖에 없었던 것은 독촉이 심했기 때문이다. 진에 도착한 형가는 진왕의 총신 몽가(蒙嘉)를 통하여 “.... 삼가 번어기의 목을 베어 그것과 함께 독 황의 지도를 대왕께 바치려고 연 왕이 배송해 보낸 사자가 왔다.”고 전하였다.
 
진(秦)왕이 크게 기뻐하여 정장하고 구빈(九賓)의 예를 베풀고 연의 사자를 함양 궁에서 인견 한 것이다. 이때 진무양은 낯빛이 변하고 떨기 시작한 것을 형가가 변명하면서 진 시황 앞에 엎드려 지도를 바쳤다. 지도를 펴니 비수가 나타났고 이 순간 형가가 왼손으로 진왕의 옷소매를 부여잡고 바른손으로 비수를 쥐고 진왕을 찔렀으나 몸에 닿지 못하였다. 진왕이 놀라 스스로 끌어 일어나자 옷소매가 끊어졌다. 칼을 빼려했으나 칼이 길어 칼집에 잡혀있었다. 시간이 황급했으나 칼이 견고해서 빼어 설수가 없었다. 형가가 진왕을 쫓으니 진왕이 기둥을 돌아 도망쳤다. 뭍 신하들이 모두 놀랐으나 졸연히 일어난 일이라 어찌 할 바를 몰랐다. 시의(侍醫) 하 무 차(夏無且)가 약주머니를 던질 뿐 이었다.
 
진왕이 당황하여 기둥만을 돌면서 도망칠 뿐 어찌 할 바를 모를 때 좌우에서 “왕께서는 칼을 지십시오 (負劍)” 칼을 질 머 진즉 칼이 빠져 형가를 쳐서 왼쪽 넙쩍 다리를 잘랐다. 형가가 몸을 가누지 못하게 되어 이에 비수를 뽑아 진왕에게 던졌으나 맞지 않고 구리기둥에 맞았다. 진왕이 다시 가격하여 여 덜 군데 상처를 입혔다. 형가는 스스로 일을 이루지 못할 것을 알고 기둥에 기대어 웃으면서 다리를 뻗고 걸터앉아서 꾸짖기를 “ 일을 이루지 못한 것은 겁박하여 반드시 약속을 받아서 태자에게 보고 하고자 함이었다.”라 하였다.

이상에서 사기열전의 자객열전의 대강을 소개하였다. 여기에는 동양사회 특유의 의협심과 관용과 헌신성 등이 여러 형태로 나타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모든 테러 행위에는 반드시 배후가 있었다. 이번 한나라 당 대표에 대한 테러행위의 초미의 관심사가 그 배후의 존재여부였고 그러한 정황이 있는 것처럼 정치적 공세가 있을 듯하다가 검찰의 중간발표가 단독행위로 단정하고 여론이 이에 승복하고 있는 것으로 간주된다. 그럼에도 그 실패한 테러행위의 정치적 결과가 피해인의 정치적 승리로 귀결할 개연성이 커지고 있다는 사실에 주목하지 않을 수 없게 한다.
기사입력: 2006/05/29 [10:48]  최종편집: ⓒ 호남조은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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