변혁의 지속을 위하여
서리 밟게 되면, 반드시 얼음이 온다
 
송승호 기자
 

왕안석은 무주(撫州) 임천(臨川)사람으로 자는 개보(介甫)다. 1042년(경력 2) 진사 출신으로 강남지역의 지방관으로 근무하였으며 이재(理財)의 능력을 인정받았다. 때마침 정치의 일대 쇄신과 개혁을 갈망한 야심적 황제 신종(神宗)에 의해 발탁되어 역사적으로 유명한 파격적인 개혁정책을 실시하게 되었다.
 
宋나라 신종(神宗)이 열 아홉에 영종(英宗)의 뒤를 이어 왕이 되었다. 나이는 어리지만 매우 영특했던 신종은 아버지 영종의 개혁정책을 이어 나갈 생각을 가졌는데 이 신종을 도와 새 정치와 새 법을 만든 이가 왕안석이다.
 
그는 1069년(熙寧 2) 참지정사(參知政事)에 임명되어 국정전반을 관장하기에 이르자 한기(韓琦)·사마광(司馬光) 등 구법당(舊法黨) 인물들을 축출하고 이재에 능한 강남출신 신진관료들을 대거 발탁 기용하여 신법(新法), 즉 농업생산성의 향상을 목적으로 종래 가뭄과 홍수 등으로 황폐해진 전토의 복구와 어전법 등에 의한 새로운 경작지의 조성 및 하천의 개수(開修) 등을 통한 조운(漕運)의 진흥 등을 골자로 한 농전수리(農田水利)정책, 농민에 대한 저리의 금융정책인 청묘법(靑苗法), 도시의 중소상인들을 대상으로 한 저리의 금융정책인 시역법(市易法), 차역(差役) 부담 대신 재력에 따라 차등적으로 면역전(免役錢)을 징수하게 한 모역법(募役法), 모병제도의 약점을 보완하기 위하여 당(唐)의 부병제(府兵制)하의 국민개병제 원칙을 모범으로 한 보갑법(保甲法)과 보마법(保馬法)을 실시하였다.
 
왕안석은 조정안의 보수세력이며, 지주, 그리고 巨商들의 반대를 무릅쓰고 새 법을 만들어 나갔다. 왕안석을 반대하는 사람들이 많았지만 신종은 왕안석을철석같이 믿고 그를 탄핵하는 사람들의 말에 기울어지지 않았다. 당시 송나라는 재정이 몹시 궁핍했는데, 이 어려운 재정을 꾸려나가는 일은 나라의 흥망이 달린 일이라 매우 중요한 일이었다.

백성들은 살기가 어려워서 세금을 더 부담시킬 수 없었고, 왕안석의 새 법은 백성들의 부담을 덜어주면서도 나라의 재정을 확보하는데 유용한 법이었다.
 
새로운 법의 시행은 순조롭지 못했다. 보수파의 반대와 반발을 일으킨 것인데, 그런 와중에 신종이 죽고 아홉 살 철종(哲宗)이 즉위하고 , 영종의 황후이며 철종에게는 할머니가 되는 선인태후(宣仁태后)가 철종을 대신하여 정사를 주무르기 시작하면서 왕안석의 신법은 하나씩 폐지되고 강녕부(江寧府)에서 병석에 있던 왕안석은 새 법이 하나씩 폐지되는 것을 지켜보며 쓸쓸히 죽어갔다.

철종이 장성해가며 새 법을 장순이라는 사람을 통해 다시 시행하지만 7년만에 죽는 바람에 역시 허사가 되고 말았다.
 
노무현 대통령이 가장 역점을 두었던 각종 개혁법안들이나 부동산문제를 비롯한 이른바 종부세문제등에 대해서 이미 실패했거나 더이상 추진할 힘을 잃었다는 것은 기정사실이다. 그 실패의 저변에는 그동안 우리 사회를 지배하는 계층들, 즉 보수세력들과 거대한 토지소유자들, 재벌등 宋의 신종때와 유사한 점이 많다. 반대하는 측에는 사마광등 유력하고 학식마저 상당했던 사람들..후대에 유명한 이름을 남긴 이들이 많았지만 역시 자신들의 이익에만 몰두한 나머지 국민들의 과도한 세금은 외면하고 자신들이 부담하는 것을 그도로 꺼려한 사람들이 당대의 실권을 잡고 있었던 것이 가장 큰 요인이다.
 
조선조에도 양반들은 자신들이 일반 백성과 다른 것은 세금을 내지 않는다는것이라는 말을 공공연히 할 정도로 세금에 관해서는 무풍지대였던 것이다. 그러나 그들이 삼정을 가장 문란하게 만들었던 주역이고, 조선조의 쇠망을 가져온 원인이 되었다.
 
모든 개혁적인 것들은 항상 기존의 힘과 부딪히고, 좌절하거나 이기는 경우가 반복되는 것이지만 구태를 방치한다는 것은 쇠락을 자초하는 것이라 사회는 늘 변혁에 몸부림치는 것이 생동감있는 사회로 가는 첩경인 것이다.
 
노무현 대통령이 집권한 이후에 가장 힘들었을 것이 이 반동이라는 것인데, 대체로 변혁에 대한 반동은 고금이 크게 다르지 않다. 변혁이 주창되는 것은 시기적으로 구태의 모순들이 새로운 흐름과 충돌하면서 일어나는 것인데 초기에는 이런 새로운 흐름이 이기는 경우가 없다. 그러나 끝까지 구태가 이기는 경우는 나라가 쇠잔해지는 결론밖에 없었고, 새로운 것에 대한 수용은 과거의 전통과 어우러져서 발전의 원동력이 되어왔던 것이 역사의 가르침이다.
 
변혁이 좌절된다는 것은 물이 흐르지 않고 고인다는 것이고, 그 오랜 세월동안의 고이고 흐르지 못한 물은 필연적으로 썩을 수밖에 없다. 썩은 물에는 생명이 없다. 혹시 있다면 기형적인 생명만이 일부 있을 뿐이다.
 
변혁이 중요한 것은 흐름을 용인하는 것인데 흐름은 때로는 범람 할 것이고 흐름과 범람은 낡은 것과 썩은 것을 밀어내고 새로운 토양을 가져옴으로서 비옥한 옥토로 만드는 효과가 있다.
 
변혁이 좌절될때는 반드시 그 징후들이 있는데, 과도하게 많은 것을 소유한 이들의 집단적인 저항이다. 국가라는 틀을 유지하고 그 속에서 살아가지만 결코 자신들은 국가라는 이름의 공적인 정책에 대해서 개별적으로 약간의 불이익만 있어도 강력한 저항과 때로는 국가라는 공적인 틀을 무시하고 부수려는 습성도 보여주곤 한다.
 
서리[霜]를 밟으면 반드시 추위가 오는 법이다. 서리는 공공의 이익이 아니라 극히 개인적이거나 일부 집단의 변혁에 대한 반동일 것이고, 그 반동이 득세할때 우리에게 돌아오는 것은 일반 국민 여러분들의 고초와 궁핍함뿐이다
기사입력: 2006/08/18 [10:19]  최종편집: ⓒ 호남조은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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