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개껍질 따윈 줘 버려라
 
안희환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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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미있는 글 한편을 읽은 기억이 납니다. 조개를 줍는 소녀들에 대한 이야기인데 상당히 인상적이면서도 마음에 와 닿는 것이 많은 내용이라 소개해 봅니다.

두 소녀가 사이좋게 바닷가에서 조개를 줍고 있었습니다. 그런 그들의 눈앞에 문득 큰 조개가 하나 보였습니다. 두 소녀의 손이 동시에 그 조개를 덮쳤습니다. 두 소녀는 서로 자기가 먼저 발견했으니 자기의 것이라고 주장했습니다.

두 소녀 모두 양보를 하지 않으려고 했습니다. 친구 사이라는 것도 잊은 채 다툼이 벌어진 것입니다. 그렇게 아옹다옹하다가 결국 고집이 센 소녀가 조개를 차지했습니다. 조개를 빼앗긴 소녀는 마음이 언짢았습니다. 지금까지 주은 것 중에 제일 큰 것이었으며 자신도 그 조개를 가지고 싶었는데 친구에게 빼앗겼기 때문입니다.

다시 조개 줍기는 계속되었지만 두 소녀는 서로 말도 안하고 급기야 다른 방향으로 헤어져 줍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조개를 빼앗겼던 소녀의 눈이 갑자기 빛나기 시작했습니다. 뜻하지 않게 아름다운 진주 하나를 발견한 것입니다. 그 소녀는 얼른 집어서 품속에 감추었습니다. 마음이 하늘로 솟구쳐 올라갈 듯 기뻤습니다.

조금 전까지 꽁한 마음을 가졌던 소녀는 진주를 가진 후부터는 마음이 완전히 풀렸습니다. 다시 친구 옆으로 다가가서 다정하게 얘기를 나누며 조개 줍기를 계속했습니다. 그들 앞에 또 큰 조개가 나타났습니다. 이번에도 두 소녀의 손이 동시에 그 조개를 덮쳤지만 그들은 더 이상 아옹다옹하지 않았습니다. 진주를 가진 소녀가 기꺼이 양보했던 것입니다.

제게는 두 명의 아들이 있습니다. 하나는 8살된 효빈이이고 또 하나는 4살된 효원이입니다. 이 아이들은 먹는 것도 좋아하고 장난감도 좋아하고 노는 것도 좋아합니다. 가끔은 어떤 가지를 서로 차지하겠다고 다투기도 합니다. 가만 보면 주로 형인 효빈이가 양보를 하고 동생인 효원이가 고집을 부립니다. 그런데 그렇게 고집부리던 효원이가 자신이 가지고 놀겠다고 하던 물건을 기꺼이 양보할 때가 있습니다. 더 좋은 것이 생길 때입니다.

필립 켈러의 [양과 목자]라는 책을 감동 깊게 읽은 적이 있습니다. 아마 두 번 가량 읽은 것 같습니다. 그 가운데 보면 양들이 서로 다투는 내용들이 나옵니다. 먹을 것을 가지고 서로 자신이 차지하겠다고 다투는 것입니다. 그러고 보면 순하고 착한 양이라는 말도 틀린 것 같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싸우던 양이 목자를 보면 싸움을 그친다고 합니다. 더 큰 존재를 보면서 자신들이 다투는 작은 것에 연연하지 않게 되는 것입니다.

짧은 세월 세상을 살아가면서 우리는 때로 너무 작은 것들을 가지고 으르렁대는 것 같습니다. 보다 큰 틀을 바라볼 수 있다면 작은 것 한둘은 충분히 양보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다 보면 서로의 관계도 더 좋아질 것이고 그 과정에서 잃을 수 있는 소중한 것들을 지킬 수 있습니다. 아니 서로간에 조화를 이루며 살아갈 수 있다는 것이야말로 가장 큰 선물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문제는 더 소중한 것을 발견하였으며 자신이 그것을 간직하고 있다고 하는 확신입니다. 단순히 눈에 보이는 조개껍질 말고 눈에 보이지는 않지만 진주처럼 영롱한 수많은 가치들을 우리는 이미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조개껍질 몇 개를 더 소유했느냐에 따라서 울고 웃고 화내고 기뻐하고 하면서 목을 맬 필요는 없는 것입니다.

저같은 경우 그것은 신앙이라고 할 것입니다. 바울 사도가 예수님을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하기 때문에 이전에 자신이 보배처럼 여기던 것을 이제는 배설물처럼 여긴다고 했는데 그 마음을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실제로 예수님의 사랑을 발견하고 그 사랑이 내 안에 있음을 깨달은 이후에 나머지 것들은 양보할 수 있는 차원이 되어버린 것입니다.

제 부모님에게는 재산이 조금 있습니다. 우리 가족이 어려운 환경에 처해 아이들 분유 먹일 돈조차 없을 때도 부모님에게 손을 내밀어보지 않았습니다. 나중에 유산을 나누어주는 것에 대해 신경을 쓰지 않습니다. 3명의 동생들에게 다 나누어주어도 상관하지 않을 것입니다. 돈이라고 하는 것이 있으면 좋지만 없어도 제 인생을 무너뜨리지는 못합니다. 제 안에는 금보다 귀한 예수님이 계시는 것입니다.

제 경우엔 이렇게 신앙이지만 사람들마다 또 다른 측면에서 소중한 것들을 간직하고 있을 것입니다. 가난한 글쟁이이면서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유롭게 글을 쓸 수 있다는 것만으로 만족해하는 시인을 알고 있습니다. 다른 사람들 보기엔 측은할지 모르지만 많이 가지려고 으르렁거리며 사는 인간 군상들보다는 더 행복한 사람이라고 생각합니다. 어차피 다 두고 갈 것 더 가지려고 소중한 관계를 깨뜨리는 것이야말로 가장 어리석은 짓이 아닌지요?

자신 안에 있는 소중한 것을 발견하고 그것을 지키며 살아가기에 베풀고 양보할 수 있는 넓은 마음을 보일 수 있다면, 나름대로 멋진 삶이 아니겠는지요?

기사입력: 2006/09/11 [10:46]  최종편집: ⓒ 호남조은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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