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천상륙작전의 2대 미스테리
김일성 인천방어 소홀, 팔미도 등대불 누가 켰나
 
조화유 기자
▲육군준장 휘트니, 유엔군총사령관 맥아더, 육군소장 알먼드가 1950년 9월 15일 인천상륙작전을 준비하고 있다.  
 
올해는 맥아더(Douglas MacArthur) 장군이 1950년 9월 15일 유엔군을 직접 지휘하여 인천에 상륙한 지 꼭 56년이 되는 해이다. 이 작전이 없었더라면 그 해 남한도 적화되어 한반도 전체는 지금 김정일의 지배하에서 직사하게 고생하고 있을 것이 틀림없다. 엄연한 역사적 사실을 무시하고 1950년 "통일 내전"에서 김일성이 이겼어야한다고 원통해 하며 맥아더 장군의 동상을 철거하라고 주장하는 대학 교수가 있는가 하면, 허구로 가득찬 김일성 전기(傳記)를 교육방송을 통해 소개하는 돌대가리 자칭 석학도 있고, 가장 자본주의적인 생활을 즐기는 자들이 반미(反美)적 영화를 만들어 은근히 김일성-김정일 정권을 찬양하면서 돈벌이를 하고있지 않나, 참 요즘 대한민국 돌아가는 꼴이 점입가경(漸入佳境)이다.
 
객관적 진실을 알려고 하지도 않고 무턱대고 반미 선동에 동조하는 순진한 젊은이들이 많은 것 같아 필자는 56년전 대한민국을 살린 인천상륙 작전의 진상을 알림과 동시에 이 작전의 2대 미스테리를 풀어볼까 한다.
 
우선 인천상륙작전이 있기까지의 전쟁 진행 상황을 간단히 살펴볼 필요가 있다.
 
- 1950년 6월25일 일요일 오전 4시: 북한군 약 9만이 소련제 탱크 130여대를 앞세우고 38선을 돌파, 남침을 개시.
같은 날 오전 9시30분: 북한 수상 겸 인민군 총사령관 김일성, 남한군이 먼저 침공을 해왔기 때문에 반격을 했다고 라디오로 허위 방송.
- 6월27일: 유엔안전보장이사회, 북한군을 침략자로 규정하고 38선 이북으로 철수할 것을 요구.
같은 날: 트루먼 미국 대통령, 극동 지역 미공군과 해군이 한국군을 지원하도록 하라고 맥아더 장군(당시 美극동군 사령관)에게 명령.
- 6월28일: 북한군 서울 점령.
- 6월30일: 트루먼, 미국 지상군 한국 파견을 명령.
- 7월5일: 미군, 경기도 오산 죽미령에서 북한군과 최초로 접전, 참패.
- 7월7일: 미국등 16개국이 참전 결정, 유엔군 사령부 설치, 맥아더을 사령관으로 임명
- 7월21일: 북한군 대전 점령, 미 24사단장 딘 소장 전투 중 실종(적의 포로가 되었다가 휴전 후 석방)
- 8월4일: 북한군 낙동강까지 밀고 내려와 남한군 및 유엔군과 장기 대치에 들어감.
  
김일성은 왜 인천방어에 소홀했나?
 
김일성은 8월15일 (광복절 5주년)까지 남한 완전 점령을 인민군에 명령하고 대부분의 병력을 낙동강 전선에 투입하고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유엔군 사령관 맥아더 장군(5성)은 인천상륙작전을 이미 구체화시키고 있었다. 그가 한반도 해안 어디엔가 상륙작전을 결행하기로 결심한 것은 그가 흑석동에서 강 건너 서울을 바라보고 돌아간 6월 29일이었던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그때 적은 이미 서울을 점령하고 3일간 휴식을 취하고 있을 때였다.
 
맥아더 장군은 인천상륙작전이 시작되기 직전 그와 친한 노련한 종군기자 몇 명을 불러놓고 "전쟁의 역사를 보면, 군대가 패전하는 이유 90%는 그 병참 공급선이 끊겼기 때문이다. 우리가 하려는 것이 바로 적의 공급선을 끊는 것이다"라고 말했다. (1950년 9월25일자 TIME지에서 인용) 그 당시 북한군의 공급선은 평양에서 낙동강까지 400km나 되었다. 교통수단이 발달되지 못한 당시, 북한군은 철도와 비포장 국도를 이용하여 군수물자를 수송할수 밖에 없었고, 그나마 미공군의 공습으로 많은 어려움을 겪고 있었다.
 
그러나 승승장구하고있는 북한군은 낙동강전선 돌파를 위해 총력을 다하고 있었다. 이때 맥아더는 교착상태에 빠진 전황을 역전시키기 위해 인천상륙을 계획했던 것이다. 적의 배후를 치고 들어가  우선 공급선을 끊고, 2개의 전선을 만들어 적 병력을 분산시키는게 목적이었다. 또 인천은 서울에 가깝기 때문에 인천을 탈환하는 것은 전략상으로나 심리전 면으로나 매우 중요했다.
 
맥아더는 처음엔 비교적 소규모 병력으로 7월22일 인천에 상륙할 계획(Operation Bluehearts)을 세웠으나 필요한 병력이 일본으로부터 제때에 수송되어오지 않아 포기했다. 대신 그는 대규모 인천상륙을 다시 계획하게 되는데, 작전명도 Operation Chromite로 바꾸었다.  맥아더가 크로마이트 작전 계획을 美국방부에 올리자 군 수뇌부는 반대했다. 맥아더 장군 휘하의 해군과 해병 장성들마저도 반대했다. 인천 앞바다의 간만의 차가 심하다는게 주된 이유였다. 밀물 때 물이 들어와 있는 시간은 하루에 고작 3 내지 4시간 뿐이어서 이 시간에 맞추어 작전하기가 어렵고, 또 만일 이 짧은 시간 중 상륙을 시도하다가 적의 반격으로 상륙이 지연되기라도 하면 그 사이에 물이 빠져나가 대형 군함들이 뻘밭에 쳐박혀 오도가도 못하게 되는 위험을 감수할 수 없다는 것이었다. 
 
로튼 콜린스 육참총장은 맥아더 장군에게 인천보다 군산에 상륙하라고 권고했다. 군산은 인천보다 자연 조건이 훨씬 좋고 또 낙동강 전선과도 가까워 적군을 바로 등뒤에서 칠수가 있어 좋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맥아더는 그로부터 직접 작전계획을 듣기 위해 토오쿄오까지 날아온 육참총장 등 군수뇌부에게 45분간 설득 연설을 했다. 그는 인천의 불리한 자연조건 바로 그것 때문에 인천을 택했다고 말했다. 즉, 이런 조건을 적도 잘 알고있을 것이므로 유엔군의 인천 상륙 가능성은 없다고 판단할 것이고 따라서 인천 방어를 소흘히 할 것이라고 설득했다.
 
맥아더는 "나는 인천 상륙이 5000분의 1 확률을 가진 도박이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다. 그러나 나는 이런 불리한 조건하에서 작전하는데 이골이 난 사람이다. 우리는 인천에 반드시 상륙하여 적을 무찌를 것이다!"라고 결론을 내렸다. 그는 "낙동강 전선에서 우리 병사들이 도살장의 소들처럼 피를 흘리게 내버려둘 수는 없다....지금 행동하지 않으면 우리는 죽는다!"라고 열변을 토했다.(맥아더 회고록 "Reminiscences"에서 인용)
 
마지못해 군수뇌부는 8월 29일 일단 인천상륙 작전을 승인하고 트루먼 대통령에게도 보고했다. 그러나 군수뇌부는 토를 달았다. 최종적인 작전계획이 수립 되는대로 보고하라고 맥아더에게 지시했다. 맥아더는 인천상륙 날자를 인천항의 수심이 가장 깊을 때로 예상되는 9월 15일로 정했다. 9월 10일 맥아더는 그의 부관 한명(육군 중령)을 토오쿄오에서 워싱턴으로 보내 크로마이트 작전 최종 계획서를 직접 들고가 군수뇌부에게 전달하도록 했다. 극비 사항인만큼 누설을 염려해 인편으로 보낸 것이다.
 
맥아더는 그 중령에게 워싱턴에 너무 일찍 가지 말고 9월14일(미국 동부시각)에 도착해 전달하라고 명령했다. 혹시 군수뇌부가 작전을 연기시키거나 상륙 장소 변경을 요구할지도 모르기 때문이었다. 군수뇌부는 맥아더가 상륙지점을 군산으로 바꾸기를 거절했을 때 다시  "보성면"(미육군 기록에 영어로 Posung-myon으로 표기되어 있으나 실제로 어느 지점인지 필자로서는 확인할수 없었음) 해안을 권고했으나 맥아더는 이것도 거절한바 있다.
 
중령은 시키는대로  9월 14일 아침 미국방부에 나타나 육참총장 등 군 수뇌부에게 작전계획서를 내놓았다. 군수뇌부는 그 중령에게 많은 질문을 퍼부었고 질문과 답변은 14일 오후까지 계속되었다. 그때는 한국시각으로 15일 새벽, 이미 인천상륙작전이 시작되고 있었다.    
 
인천상륙작전은 물론 극비리에 준비되었다. 그러나 어떻게 새어나갔는지 이 정보는 유엔군 사령부가 있던 일본 토오쿄오 언론계에서는 공개된 비밀이 되었다. 그런데도 김일성은 인천 방어를 강화하지 않았다. 그 당시 인천에는 병력 약 2천명과 월미도에 대함포 몇 문을 가지고 있는 해안포대 1개 대대, 그리고 주변의 작은 섬들인 영흥도, 대부도, 팔미도 등에 약간의 인민군들이 있었을 뿐이다. 
 
토오쿄오에는 당시 소련의 첩자들이 많았으므로 김일성이 맥아더의 인천상륙 작전 소문을 듣지 못했을 가능성은 없어 보인다. 그렇다면, 왜 김일성은 끝내 인천 방어노력을 하지 않았는가? 이에 대해 군사 전문가들과 역사가들은 여러 가지 가설을 내놓고 있는데, 필자가 보기엔 다음과 같은 가설이 가장 사실에 가깝지 않을까 생각한다. 그것은 김일성이 자연 조건이 나쁜 인천보다는 군산이나 그 밖의 다른 곳을 유엔군 상륙 지점으로 예상했고, 맥아더가 김일성의 판단을 흐리게 하기 위해 인천상륙작전 소문을 일부러 흘렸다고 생각했을 것이라는 얘기다.
 
인천에 상륙하는 함정들을 포격할 것이 확실한 적의 월미도 해안포대를 미리 파괴하기 위해  맥아더는 9월 13, 14 양일간 함정 5척을 월미도 앞바다로 보내 공격을 가했다. 그는 적이 이것을 인천 상륙의 신호로 눈치채지 못하도록 다른 여러 곳도 동시에 찝적거렸다. 즉,  미해군 함정들을 동해안으로 올려보내 강원도 삼척에 함포사격을 가했고, 한국 해병대로 하여금 포항과 군산에 상륙을 시도하는척 하도록 지시했다. 또 평양 외곽 항구 진남포에도 항공기를 이용한 소규모 공격을 가했다. 모두가 인천상륙작전을 은폐하기 위한 교란 작전이었다.
 
중국이 김일성에게 유엔군의 인천 상륙작전 계획을 마지막 순간에 알려주었으나 그 때는 이미 너무 늦었었다는 설도 있다. 그러나 김일성이 이미 죽었으니 그가 왜 인천 방어를 소흘히 했는지는 영원한 미스테리로 남을 수 밖에 없을 것 같다.  
  
팔미도 등대불은 누가 켰나?
 
인천상륙작전의 또 하나 미스터리는 1950년 9월15일 꼭두새벽 인천 상륙작전 개시 약 2시간 전에 누군가가 인천 앞바다 팔미도 등대에 불을 켜서 상륙 함정들이 좁은 비어수로(飛魚水路)를 통해 인천항으로 무사히 진입하도록 해주었는데, 그게 누구냐 하는 것이다. 
 
지금까지는 美해군 대위 유진 클라크(Eugene F. Clark)가 KLO(한국인들로 구성된 유격대로 정규군 부대가 아님)소속 X씨(전쟁 당시 28세, 현재 83세로 생존)에게 지시하고 X씨가 중심이 되어 팔미도 등대에 점화한 것으로 알려져 왔다. 그런데 최근에 클라크 대위(1998년 작고)가 남긴 수기가 발견되어 미국에서 출판되었는데, 그 책에는 X씨가 전혀 언급 되어있지 않다. 그 책에 X씨 이름이 나오지 않는다고 해서 X씨가 등대불을 켜지 않았다고 단정할 수는 없지만, 어쨌든 클라크 대위의 책을 토대로 팔미도 등대 점등 경위를 재구성해 보기로 하겠다.
 
맥아더 사령부는 인천 작전을 감행하기 전에 인천에 대한 정보를 먼저 수집하기 위해 8월26일 토오쿄오(東京)의 美극동군 사령부 G-2(첩보부)에서 일하고 있던 클라크 해군 대위(당시 39세)를 호출했다. 그리고 그에게 인천 앞 바다의 자연 조건(수심. 간만의 차이, 뻘밭의 넓이 등등)과 인천및 월미도의 적 병력 규모, 그리고 적이 항만 해저에 지뢰를 매설했는지, 또 인천항으로 들어가는 두 뱃길에 항해등은 작동하고 있는지 여부 등을 알아보라고 명령했다.
 
클라크 대위는 일단 같이 일할 사람을 모집하기 위해 토오쿄오에서 대구로 날아갔다. 거기서 그는 전에 G-2에서 같이 근무했으며 영어가 유창한 한국 해군 대위 연정(당시 30세)과  한국 육군 방첩부대장을 지냈고 역시 G-2에도 근무한 바있는 계인주(당시 42세) 대령을 차출해서 일본으로 데리고 갔다. 그리고 한국에서 작전할 때 필요한 쌀등 식료품과 한국돈 100만원도 마련했다. (당시 원-달러 환율은 1800 대 1이었다고 한다.)
 
클라크 대위와 두 한국군 장교는 8월말 일본 사세보 군항에서 마침 한국전선으로 가는 영국 해군 함정에 편승, 9월 1일 아침 인천 앞바다 덕적도 근처에 도착했다. 앞으로 2주일간 클라크 대위의 작전을 지원해줄 한국 해군 함정 한 척과  덕적도 근해서 만나기로 약속이 되어있었기 때문이다. 이 함정(PC-703호)의 선장은 이성호 중령, 행정장교는 현시학 소령(나중에 미국주재 한국 공사가 됨), 후에 해참총장이 된 함명수 대위는 함포사격 담당이었다.
 
팔미도 등대 점등에 주요한 역할을 했다고 말하는 X씨는 부산에서 한국 해군 "백구호"를 타고 덕적도로 가서 클라크 대위를 만났고 그로부터 인천상륙작전이 있을 거라는 귀띔을 받고 놀랐다고 말한 것으로 알려졌으나 앞서 말한 것처럼 클라크의 수기에는 X씨의 이름이 전혀 나오지 않는다. X씨는 또 8월 18일부터 클라크 대위와 일하기 시작했다고 말한 것으로 알려졌으나 그 때는 클라크가 일본에서 특공작전 명령을 받기도 전이다. 날자가 틀리는 것은 X씨의 기억력 쇠퇴 때문일 수도 있지만, 클라크가 X씨에 대해서 한번도 언급하지 않은 것은 잘 이해가 안가는 대목이다. 클라크 수기에는 한국인 이름이 30개 정도 나오며 중요한 인물은 얼굴 모습까지 묘사했다.)    
 
영흥도를 주요 거점으로 하고 클라크 특공대는 인천 앞바다에 관한 정보를 수집, 토오쿄오의 맥아더 사령부로 타전했다. 클라크는 인천 항구로 들어가는 좁은 해협인 비어수로 등 세 군데에 있었던 항해등이 적에 의해 모두 파괴 되어있다고 본부에 보고함과 공시에 팔미도에 있는 등대가 아직 작동하고 있는지 알아보겠다고 보고했다. 그는 9월3일 밤 연정 등 한국인 특공대원들을 데리고 팔미도에 들어가 보았다. 등대 안으로 들어가는 문이 잠겨있었다. 적군이 팔미도에 없다고 판단한 클라크 일행은 곧 그곳을 떠나 영흥도로 돌아갔다.
 
9월 9일 밤 클라크 일행은 다시 팔미도에 상륙, 이번엔 등대 안에 들어가 보았다. 그는 기계에 찍힌 글을 보고 등대에 불을 밝히는 기계가 프랑스 파리에서 제작된 것이며 석유를 태워서 빛을 내는 석유등 임을 알수 있었다. 석유통에는 기름이 반쯤 남아 있었고 등 자체도 별로 이상이 없었다. 그는 불을 붙여보았다. 불꽃이 별로 크지 않아 심지있는 부분을 깨끗이 닦아 불꽃을 크게 만들었다. 그러나 등대 불빛이 깜빡거리게 하거나, 불빛 비추는 방향을 바꾸게 하는 장치는 건전지가 낡아 쓸수가 없었다. 그래서 불빛이 깜빡이지 않고 한쪽 방향으로만 집중적으로 비추도록 고정시켜 놓고 불을 껐다. 그리고 토오쿄오의 사령부에 "등대 사용 가능. 점등 시각 지시 요망"이라고 무전을 보냈다. 
 
등대 점검을 마친 클라크는 장난끼가 발동하여 등대 문에다 Kilroy Was Here! 9 September 1950 이라고 써놓았다. 연정이 그게 무슨 뜻이냐고 물어서 그는 2차 세계대전 중 미군들이 어떤 곳을 먼저 점령했을 때 뒤늦게 오는 군인들을 놀려주려고 장난삼아 "킬로이가 이미  다녀갔다"고 쓰곤 했었다고 일러주었다. 킬로이는 실존 인물이 아니고 동에 번쩍, 서에 번쩍 신출귀몰하는 가상의 군인 이름이다. 그러니까 "홍길동이가 먼저 다녀가네!"라고 쓰는 것과 같다고 할 수 있다.
 
9월 14일 클라크 대위는 사령부로부터 다음날(15일) 0시30분에 팔미도 등대에 불을 밝히라는 명령을 무전으로 받았다. 이날 클라크 일행은 영흥도에 있었는데 이 섬을 다시 빼앗으려고 들어오는 인민군들을 피해 밤늦게 그곳을 떠나 작은 발동선을 타고 팔미도로 향했다. 그들이 팔미도에 상륙했을 때는 이미 15일  0시30분, 등대 불을 켜야할 시각이었다. 그러나 클라크와 연정은 팔미도에 미리 와있던 부하들로부터 오인사격을 받는 바람에 시간이 지체되어 언덕 위 등대까지 올라가 등대에 불을 켰을 때는 이미 0시 50쯤 되었다. 클라크 대위는 20분이나 늦게 등대불을 켠데 대한 불안감을 안고 등대 밖으로 나왔다. 그 동안 쌓인 피로 때문에 그는 땅에 드러누워  곧 잠이 들었다. (X씨는 등대 점등 장치의 나사못이 빠지고 없어 그 나사를 찾느라고 시간을 많이 보내 오전 2시 20분에야 불을 켰다고 말한 것으로 알려졌다.)
 
얼마 후 연정이 클라크를 흔들어 깨웠다. 그리고 등대에서 약 70미터 아래로 내려다보이는 바다를 손으로 가리켰다. 배의 종류는 확실히 알수 없었으나 군함 6척이 미끄러지듯 소리없이 지나가고 있었다. 아직 동이 트기 전이라 어두웠지만 군함들의 윤곽이 어슴프레 보였다. 함정들은 계속해서 줄을 이어 팔미도 등대 불빛을 항해등으로 삼고 인천항으로 들어갔다. 역사적인 인천 상륙작전 1차 공격 즉, 월미도 점령 작전이 시작된 것이다. (2차 공격은 다시 밀물이 되는 오후 5시 이후에 감행되어 밤사이에 인천을 거의 전부 탈환하게 된다)
 
날이 밝아 아침이 되자 클라크는 망원경으로 맥아더 장군이 타고 있을 기함(旗艦) 마운트 매킨리 호(號)를 찾아냈다. 그리고 통통배를 타고 연정, 계인주와 함께 매킨리호 쪽으로 접근해갔다. 기함에 가까이 이르렀을 때 그는 그의 해군 장교 모자를 벗어 손에 들고 흔들었다. 그러자 거대한 매킨리호 함상에서 누군가가 메가폰을 입에 대고 "접근하지 말고 정지하라!"고 소리쳤다. 매킨리호에서는 클라크 등이 타고있는 디젤엔진 통통선을 적의 자살 특공 선박으로 의심한 것 같았다. 클라크는 통통선 선장(李씨로만 밝혀짐)에게 엔진을 끄라고 지시했다. 그러자 기함으로부터 소형 상륙정 한척이 접근해 왔다. 거기에 탄 해군소위가 기관단총을 클라크 대위에게 겨누었다.
 
"누구냐?" 소위가 물었다. "나는 미해군 대위 유진 클라크다. 사람 다치기 전에 총은 치워라!" 클라크가 대꾸했다.
 
소위는 기함으로 돌아가 함장에게 미해군 대위라는 자가 이상하게 생긴 작은 발동선에 타고 있다고 보고했다. 함장이 "그 자가 우리 해군 장교라는 걸 어떻게 믿을수 있나?"고 묻자 소위는 "우리 해군 장교모자를 쓰고 있습니다"라고 대답했다.
 
이렇게 해서 클라크가 먼저 기함에 승선, 신분이 확인되자 통통배에 남아있던 두 한국군 장교 연정 해군 대위와 계인주 육군 대령도 매킨리호에 올라갈수 있었다.
 
인천 상륙작전이 끝난 후 클라크 대위는 미해병대 병력을 영흥도와 대부도에 좀 보내 그곳의 적을 소탕해 줄 것을 작전사령부에 부탁했다. 그는 그 두 섬에서 자기를 도와준 한국인 50여명이 적에게 희생되었다고 보고하고 그들의 원수를 갚아달라고 말했다.
 
클라크 대위는 인천 상륙작전 후에도 연정과 함께 북한 서부해안 일대에서 한국 KLO유격대원 150여명을 지휘하여 해안지역에서 게릴라전을 수행했고 압록강까지 가서 중공군의 남하 사실도 가장 먼저 탐지해 본부에 타전했다. 그는 동부전선으로 이동, 원산지역에서도 중공군을 상대로 첩보작전과 게릴라전을 펼쳤다. 이러한 공로가 인정되어 클라크와 연정은 미군 최고 영예인 Silver Star(은성무공훈장)를 각각 받았다.
 
클라크는 1966년 중령으로 퇴역, 캘리포니아와 네바다 주에서 살다가 1998년 86세를 일기로 별세했다. 그가 죽은 후 가족들은 그의 유품을 정리하다가 그가 쓴 수기를 발견했다. 그것은 한국전쟁 중 그의 경험을 자세히 기록한 것이어서 가족들이 재미있게 읽었다. 그런데 2000년 MHQ(Military History Quarterly/계간軍史) 잡지에 토마스 플레밍이라는 군사전문 저술가가 유진 클라크 대위에 관하여 쓴 글을 클라크의 미망인과 자녀들이 우연히 읽게 되었다. 가족들은 고인이 남긴 수기를 토마스 플레밍에게 보냈다.
 
플레밍은 그 글을 읽고 역사적 가치뿐만 아니라 문학적 가치도 있다고 판단,  유명한 출판 그룹 Penguin 계열사 Berkley 출판사를 통해 The Secrets of Inchon (인천의 비밀)이란 제목으로 2002년에 출판, 언론의 호평을 받았다. 시카고 썬 타임즈 신문은 "헐리우드 영화제작자들도 상상하지 못할 만큼 스릴에 넘치는 실화다"라고 격찬했다.   
  
한편 한국인 연정씨는 전쟁이 끝나고 해군에 더 복무하다가 전역하고 미국으로 건너가 오래  살다가 얼마 전 L.A.에서 작고했다. 그는 1973년 일본 반쪼쇼보(番町書房) 출판사를 통해 회고록 "캐논기관으로부터의 증언"을 출판했다. 이 책에도 팔미도 등대 점등에 관한 이야기가 나오지만 클라크 대위만큼 상세히 기록하지는 않았다. 그는 등대에 불을 켠 후 불빛이 적이 있는 인천쪽으로는 가지 않도록 하기 위해 두꺼운 종이 상자를 뜯어 등의 한쪽을 가렸다고 쓴 것이 필자의 기억에 남아있다.    
 
인천상륙 작전에는 7만 1천명의 병력이 동원되었는데  미해병 1사단과 육군 보병 7사단이 주축이 되어 조직된 미10군단(사령관 아먼드 소장)이었다. 한국군은 KATUSA(속칭 카츄사) 약 7천명과 재일동포 지원병 641명도 참가했다. 작전에 동원된 함정은 총 261척, 맥아더 장군은  작전함대 사령관 도일 제독의 기함 마운트 매킨리호에 타고 있었다.
 
클라크 대위와 연정이 팔미도 등대에 불을 켠 사실이 상륙 당일에는 함상의  맥아더 장군이나 상륙작전 고위 지휘관들에게까지 것 같지는 않다. 왜냐하면 맥아더 장군을 바로 옆에서 취재한 종군기자 칼 마이던이 TIME지에 이렇게 쓰고있기 때문이다.
 
"인천 항구쪽에서 깜박거리는 불빛이 보였다. 그것을 보고 도일 해군 제독이 맥아더 장군에게 "적이 (고맙게도) 항해등까지 켜놓았군요"라고 말하자 맥아더 장군은 "(그 놈들) 예의 한번 바르군"이라고 말했다." (1950년 9월25일자 TIME지 기사에서).  맥아더가 타고 있던 군함에서 팔미도 등대까지는 상당히 먼 거리였으므로 등대불이 깜박거리는 것처럼 보였을지도 모른다.
기사입력: 2006/09/15 [11:58]  최종편집: ⓒ 호남조은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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