된장녀 FTA 그리고 김수영의 비니루 장판
근대적응과 근대극복 이룬 김수영문학을 다시 생각해야
 
이욱연 칼럼니스트

 
된장녀라는 괴상한 조어(造語)가 유행이다. 스타벅스 커피를 마시고 쎅스앤씨티의 주인공들처럼 브런치를 먹고, 오프라 윈프리 쇼와 미국 씨트콤을 즐겨 보면서, 뉴요커의 라이프스타일을 추구하는 여성들을 비난하기 위해 그들의 라이프 스타일을 감당하지 못하는 남성들이 만들어낸 조어이다.
 
문화적 기호를 가지고서 성별을 구분해 여성들에게 일방적인 비난을 퍼붓는 것은 그야말로 남성중심사회의 폭력이다.
 
더구나 지금 현실이 성별에 따라 스타벅스 커피를 마시며 브런치를 먹는 된장녀와 자판기 커피를 마시며 구내식당 밥을 먹는 고추장남으로 나누어지는 것이 아니라, 경제력에 따라 <된장녀·남>과 <고추장남·녀>로 나뉜다는 차원에서 보자면 된장녀는 기본적으로 잘못 설정된 개념이다.
 
뉴요커의 라이프스타일이 된장녀들만의 꿈이 아니라 고추장남들, 아니 요즘 거의 모든 젊은 세대의 꿈인 것이 현실이고, 고추장남 못지않게 매일 구내식당 밥에 자판기 커피를 마시며 다리가 퉁퉁 붓도록 아르바이트를 뛰는 고추장녀들도 수두룩하기 때문이다.
 
그러고 보면 된장녀 파동은 경제 양극화라는 요즘 청년사회의 심각한 고민거리를 남녀 성별의 문제로 호도해 손쉽게 해소시켜버리는 일이 아닐 수 없다.
 
그런데 흥미로운 것은 청년사회의 그런 양극화가 남과 여라는 성별로 치환되기도 하지만 뉴요커의 라이프 스타일과 한국 취업준비생의 라이프 스타일이라는 미국과 한국, 두 국가 사이의 경제와 문화적 낙차로 둔갑하는 점이다.
 
된장녀·남과 고추장남·녀 사이의 격차가 미국과 한국의 경제적·문화적 격차로 현상되는 것이다. 된장녀가 집중 포화를 당하는 저변에는 이러한 민족적·국가적 코드 역시 작동하고 있는 셈이다.
 
한국과 미국 사이에 가로놓인 이런 낙차감 속에서 낙후된 한국 현실에 질색하며 그것을 거부하는 사람들에게 미국의 모든 것은 형이상학적 동경과 신앙의 대상이자, 삶의 절대적 표준이 되기 마련이다.
 
된장녀·남에게 스타벅스 커피를 마시는 것이 그저 카페인을 섭취하는 일이 아니라 미국 선진문화의 라이프 스타일을 자기 것으로 하면서 낙후된 한국 현실에서 탈출하는 문화적 신분상승의 행위가 되는 것은 그런 연유이다.
 
한창 협상이 진행중인 한미FTA가 우리에게 얼마만큼의 실익과 불이익을 가져다줄지를 두고 경제학자들끼리도 분석이 다른 판국에 보통 국민으로서 그것을 어림하기란 쉽지 않다.
 
하지만 일부 사람들이 한미FTA에 이토록 조급해하면서 강박적으로 집착하는 모습을 보면 지금 한미FTA는 그런 경제 차원의 실익 여부를 따지는 단계를 넘어선 것처럼 보인다.
 
일개 방청객 입장에서 보더라도 한미FTA에 대한 집착은 경제나 안보 차원에서라기보다 차라리 형이상학적인 차원에서 나오는 것처럼 느껴지곤 한다.
 
뉴요커의 라이프 스타일이 일부 젊은이들에게는 삶의 절대적 표준으로서 형이상학적 동경과 신앙 차원의 경배 대상이듯이, 한미FTA에 목숨을 거는 심리 역시 그러해 보이는 것이다. 그러니 협상 체결 이후 실익과 불이익을 냉철히 따져보자는 사람들의 요구가 그들의 귀에 들어올 턱이 없다.
 
된장녀·남들이 <보그Vogue> 같은 미국 패션잡지를 즐겨 보고, <보그> 한국판이 김수영의 시 [VOGUE야!](1967)를 광고전략으로 이용하면서 이 시가 새삼스레 화제가 되고 있기도 하다. 시에서 김수영은 "VOGUE야, 넌 잡지가 아니야"라고 말했다.
 
시에서 미국 대중문화의 욕망을 상징하는 패션잡지 보그는 "신성을 지키는 시인의 자리"보다 더 높은 곳에서 "하늘을 가리켜주는 잡지"이다. 김수영에게 보그가 단순한 잡지가 아니라 지고의 위치에 있는 것은 보그 속 화려한 미국문화를 바라보는 시인이 "구공탄을 떨어뜨려 탄 자국"이 난 "비니루 장판"을 깔고 살고 있어서다.
 
그런데 김수영은 보그와 비니루 장판의 현실 사이의 낙차 속에서 비니루 장판으로 상징되는 낙후된 한국 현실에 넌더리를 내며 탈출해버리거나 보그에 일방적으로 매혹당한 채 미국문화 속에 그것을 해소시켜버리지 않는다.
 
김수영의 선택은 보그를 인정하면서도 그 보그의 세계와 한국의 현실 사이에 "스크린"을 치고 남루한 현실을 온전히 자기 것으로 껴안는 것이다. 아들을 위해서, 후손들을 위해서, 그렇게 스크린을 친 죄를 스스로 감당한다.
 
이는 한국의 낙후에 안주하는 것도, 보그의 세계로 날렵하게 비상하는 것도 아니다. 후대를 위해, 역사를 위해, 근대적응과 근대극복을 동시에 껴안고 자기 세대의 과제로서 실천하는 몸부림이다.
 
아마도 뉴요커의 라이프 스타일을 추종하는 된장녀·남이나 한미FTA에 강박적으로 매달리는 사람들은 미국과의 통합만이, 보그를 가지고서 비니루 장판의 현실을 대체하는 것만이 한국 근대의 고질병인 한국과 미국 사이의 낙차를 근원적으로 치유할 방법이라고 생각할 것이다.
 
하지만 그것이 치유가 아님은 너무도 명백하지 않은가. 그것은 한국 현실을 미국 속에 완전히 해소시킴으로써, 내가 죽음으로써 내 죽음과 더불어 나를 괴롭혀오는 고질병도 따라서 죽는 식의 치유 아닌가.
 
보그의 미국과 비니루 장판의 한국 현실 사이에 놓인 낙차를 온전히 자기 것으로 감당하면서 모더니즘과 리얼리즘을 관통하고 근대적응과 근대극복이라는 이중적 과제를 성취한 김수영 문학의 모델이 한국경제에서는 정녕 불가능한 것일까./e조은뉴스 기사제휴사=대자보
 
 
* 글쓴이는 문학평론가이며, 서강대 중국문화학과 교수입니다. 주요 평론으로 <중국문학으로 가는 길> 등이 있습니다.
* 본문은 디지털 창비(http://weekly.changbi.com) 2006년 9월 20일자 주간 논평입니다.

기사입력: 2006/09/22 [08:53]  최종편집: ⓒ 호남조은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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