탈출구없는 분노, 대한민국은 폭발직전
민중들의 분노는 갈 길 잃고 가학적으로 변해가
 
우석훈 칼럼니스트
▲하버드 대학생의 생활을 그린 드라마의 한장면    
 
1. 하버드 대학과 미국의 좋은 전통
 
어느 나라나 정말 좋은 전통을 가지고 있다. 미국에도 좋은 전통이 있는데, 자신의 학교 출신을 자기 대학 교수로 뽑지 않는 미국 대학의 독특한 전통이 어떻게 생긴 것인지 무척이나 궁금했다. 우리나라는 특정 몇 개 대학 출신이 전체 대학 교수의 대부분을 차지한다. 미국형으로 간다고 난리치면서도 우리나라에 절대로 도입되지 않을 미국의 좋은 제도에 관한 이야기이다.
 
40년대 하버드 대학의 어느 총장이 “모교출신을 받지 않겠다”고 선언하면서 성공하였고 확산된 전통이라고 한다. 원래 편한 게 좋고, 좋은 게 좋은 것이라고 하지만, 미국 대학의 이런 전통은 스스로를 불편하게 만들면서 전체가 편해진 제도인 셈이다.
 
“좋은 게 좋은 것이다.” 이런 전통은 불쾌하고 불편하기도 하지만, 미래가 보이지 않는 나쁜 제도이다.
 
우리나라는 현재 “좋은 게 좋은 것이다”가 지배하고 있다.
 
2. 로빈 훗과 빌헬름 텔
 
로빈 훗과 빌헬름 텔은 영국과 스위스라는 공간의 차이도 있고, 십자군 전쟁 막판이라는 13세기와 스위스가 오스트리아로부터 독립하게 된 14세기에 발생한 사건이라는 점에서 1세기 정도 차이가 나는 이야기이다. 로빈 훗은 사자왕 리처드와 관련되어 있고, 빌헬름 텔은 사실상 스위스의 건국 신화에 나오는 이야기이다.
 
그래도 이 이야기들은 신화라는 관점에서 아더왕과 관련되어 있고, ‘아발론(Avalon)’이라는 ‘일곱 그루의 사과나무가 피어있는 땅’과 관련되어 있다. 아더는 죽은 것이 아니라 아발론에서 여신들의 보호를 받으며 잠들고 있을 뿐이고, 언젠가 아더가 다시 일어서는 날 천년 왕국이 시작될 것이라는 전설들과 직간접적으로 연결되는 신화들이 로빈 훗과 빌헬름 텔의 얘기들이다.
 
전부 켈트족의 신화라는 공통점을 가지고 있다. 훈족에 밀려 유럽 중앙에 있던 켈트족들이 한 쪽으로는 영국으로 밀려나갔다가 다시 색슨족에 밀려서 스코틀랜드와 아일랜드로 퍼지게 되었고, 또 한편으로는 알프스 산 속까지 밀려갔다가 오스트리아 합스부르크 왕가의 혹독한 지배를 받게 되었는데, 이들이 지금의 스위스를 형성하게 된다.
 
미국의 민중과는 다른, 그리고 프랑스의 민중과도 다른, 또 다른 민중들의 꿈에 관한 이야기이다. 활을 아주 잘 쏘는 영웅이 등장해서 민중들이 잘 먹고 잘 사게 되는 날... 이런 켈트족의 민중 신화의 전통에서 민중들이 서로 배신하고, 서로 괴롭히는 얘기는 거의 없다. 다만 그들은 지금 힘이 없을 뿐, 아더든, 로빈훗이든 혹은 빌헬름 텔이든, 활을 잘 쏘는 영웅이 등장할 때까지 참고 버티면서 서로에게 힘이 되는 존재로 설정되어 있다.
 
배신... 위의 영웅 얘기에서 배신은 민중의 몫이 아니라 기사들의 몫이다. 가장 슬픈 배신은 로빈훗의 얘기에 나온다. 누이, 자신의 누이가 온 몸의 피를 빼고, 그렇게 몸의 피를 모두 뽑힌 로빈훗의 죽음은 어느 신화 속의 죽음보다도 슬픈 죽음이다.
 
3. 아래로의 경쟁 그리고 “아랫 것들의 분노”
 
현재 OECD 선진국들이 가지고 있는 민중설화와 시대 이야기 중에서 민중들끼리 서로 괴롭히고 헐뜯고 싸웠다는 얘기가 사람들을 움직인 경우를 별로 보지 못했다. 프랑스의 전설적 신화 “레미제라블”의 경우에는 끝까지 괴롭히는 사람은 바로 형사였다. 18세기 프랑스의 비밀경찰은 세계 최초의 비밀경찰이고, 지금도 프랑스 경찰학교에는 비밀경찰사에 관한 강좌가 개설되어 있고, 우리나라의 경찰대학에서도 가끔 이 학교의 비밀경찰 과정으로 유학오는 사람들이 있을 정도로 오래된 “통치 장치”에 관한 이야기이다.
 
지금 우리나라는? 역사 속에서 잘 발견되지 않고, 우리나라에도 그렇게 전통적인 모습이 아닌 “아래로의 경쟁”이 진행되는 중이다. 보통은 “위의 것”들 때문에 내가 살기가 어렵다고 민중들이 생각하기 마련이고, “가혹한 외부인” 즉 로빈훗의 색슨족이나 스위스의 합스부르크 왕가처럼 외부 지배자를 상정하거나 아니면 그만큼 혹독한 “독재자” 같은 걸 설정하고, 이런 사람들의 존재 때문에 자신의 삶이 어려워졌다고 생각하는 것이 일반적인 민중 신화이다. “위로의 경쟁”을 끊임없이, 자신들의 신화와 무의식 속에서도 가지고 있다가, 어느 날 이런 것들이 터져나오는 것들을 폭동 가끔은 혁명이라고 부른다.
 
근대국가 형성의 첫 번째 사건인 루이 16세 시절의 프랑스 혁명의 첫 출발점은 배고파서 “바게뜨(빵)”를 달라고 파리에 모였던 어머니들이 “바게뜨가 없으면 고기나 과자를 먹으면 될 것 아니냐”는 마리 앙뚜와네뜨의 엉뚱한 답변에 열 받아서 한걸음으로 파리 근교에, 걸어서 가기에는 만만치 않은 베르사이유궁으로 달려가면서 프랑스 혁명이 시작된다.
 
내가 배고픈 것이 귀족 때문이야, 아니면 황제 때문이야?
 
프랑스 혁명의 경우는 황제의 세금 때문이라고 생각했고, 베르사이유궁 따위를 만들면서 흥청망청 하니까 내가 배고픈 것이라고 사람들이 생각한 셈이다.
 
이런 것들을 대개 “위로의 경쟁”이라고 부른다. 경제 피라미드에서 자기보다 윗단에 있는 “분들” 혹은 그 최정점에 있는 분들 때문에 자신의 삶이 어려워졌을 것이라고 생각하게 되고, 먹이 사슬에서 자신과 비슷한데 있거나 아래에 있는 사람들과는 “튼튼한 연대의식” 같은 것들이 생겨난다. 이 때 이들을 “people” 즉 우리말로 민중이라고 부른다.
 
그런데 2006년, 지금 우리나라에서 분노는 서로 유사한 위치 혹은 민중들끼리 서로를 향해서 폭발하는 중이다.
 
4. “된장녀”, “선생님 월급”, “요승 논쟁”, 이 슬픈 경쟁이여!
 
시스템으로만 보면 우리나라의 민중들은 자신이 어려운 이유를 사실상 최고위의 통치장치인 미국이라고 생각하거나 아니면 정치권력의 정점을 이루는 대통령 때문 혹은 그와 연대한 고위 정치인들이라고 생각하는게 보편적일 것 같다. 도대체 대통령이 뭘 잘못했겠느냐? 원래 민중설화는 진실과 진실 아닌 것을 가리지 않는다. 어수룩해 보여도 그것을 역사가들은 보통 “민중의 지혜”라고 부르는 것 같다.
 
아무리 사실이 그것이 아니라고 해도, 정조는 독살당했을 것이라고 정약용이 말했다는 설화가 남도에 퍼져있다거나, 진실과는 상관없이 누구나 다 고종황제는 일제로부터 독살당했을 것이라고 믿거나 혹은 이순신 장군은 노량해전에서 죽은 것이 아니라 어디론가 도망쳐서 평온한 노년을 가졌을 것이라고 믿는 것들이 바로 민중의 지혜이고, 민중설화이다. 사실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믿고 싶은 것이 중요하기 때문에, 민중의 시각에 근거한 민중사관과 역사 속으로 드러난 사실만을 말하자는 “실증사학”은 곧잘 대립되기 마련이다.
 
우리나라 역사는 일제 때 형성된 실증사학의 일종인 진단사학회 같은 곳이 역사학의 주류를 형성하면서 형성되었기 때문에, 사람들은 이런 역사학자들의 주장을 잘 믿지 않고, 민족사관이나 재야사학자 같은 사람들의 말에 더 귀를 기울이고 싶어하는 경향이 있다. 동학과 같은 종교나 단군 신화 같은 것들 혹은 고구려 얘기들이 생동감이 있는 것은 그것들이 ‘실증’ 되어서가 아니라 민중의 이야기의 속성을 더 많이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요즘은 좀 이상하다.
 
‘된장녀’ 논쟁이 가지고 있는 가장 슬픈 점은, 남자들이 자신의 삶이 어렵고 고단하게 된 이유의 하나로 바로 자신들과 같이 살아가는 “여성들”을 원망과 한탄의 대상으로 삼았다는 점이다. 논쟁 구조 자체가 너무 슬프다. 오죽 한탄의 방향을 찾기가 어려우면, 남자는 여자를 원망하고, 여자는 남자를 원망하는 논의 구도로 변했을까... 민중신화의 관점에서는 퇴행적이어도 이 이상 퇴행적인 논쟁이 있을 수가 없다.
 
선생님들의 월급이 “OECD 국가 중 단위 시간당 최고”라는 통계를 두고 이번에는 선생님들한테 화살이 날라든다. “그래 너희들은 방학도 있고, 짤리지도 않는데, 돈도 그렇게 많이 받는단 말이야?” 역사상 어떤 민중 신화도 교육을 담당하는 선생님을 대상으로 이렇게 처절하고 잔인한 말을 뱉어낸 적이 없다. 심지어 일제 때 교육을 담당했던 선생님들, 가끔은 “황군으로 봉사하라‘는 말을 했던 일제 때의 선생님들에게도 이렇게 민중들이 가혹한 분노를 드러낸 적이 없었는데, 대한민국 민중들... 선생님들에게 온통 분노를 뿜어낸다. 선생님들 월급이 높기는 뭐가 높냐... 그리고 좀 높으면 어떠냐... 어차피 대한민국 경제 피라미드의 상층부를 형성하는 한 번에 1,000억원씩 벌어버리는 골프장 인근의 산을 소유했던 땅부자, 그리고 한 번에 100억원씩 벌어버리는 뉴타운과 행정복합도시 근처의 주유소 주인이나 작은 건물주들과 같이 진짜 노무현 시절에 큰 돈 벌었던 사람과 비교하면, 선생님들이 1년에 몇 백 만원 더 벌거나 덜 벌거나 그게 뭐가 중요하냐. 
 
자신들과 비교해서 다를 것이 아무 것도 없는 21세기 민중들 속에서 “자기 자신”을 향한 분노의 표출은 퇴행적이다 못해 자학적이다. 자신들에 대한 지배자가 아닌 바로 자신들을 향한 분노가 하늘을 찌른다.
 
지율스님을 향해서 터져나왔던 소위 “요승논쟁”의 연장선에 있는 듯하다. 경부고속철의 개통이 잠시 늦어졌기 때문에 엄청난 일이 생기지는 않았지만, 상공회의소의 2조원 손실 같은 추정치를 보면서 지율스님에게 달렸던 “요승” 논쟁이 끝간데가 없이, 이제 그 에너지 그대로 스스로를 향하고 있는 셈이다.
영웅은 없고, 그 영웅 자리를 잠시 차지했던 황우석 박사가 신화의 뒤안길로 사라진 공간에 사람들은 스스로를 향해서 날카로운 독설과 저주를 퍼붓고 있는 이 시기, 민중의 설화라는 것은 존재하지도 않는다.
 
그야말로 줄 뒷쪽에서 줄 앞에선 사람들은 아무 신경도 안 쓰는데, 한 칸이라도 앞으로 가기 위해서 자기 동료들을 가차없이 옆길로 밀어버리는 슬픈 존재들의 가냘픈 분노... 그것이 된장녀 논쟁을 뒷받침하는 에너지가 아닐까?
 
5. 일부, 동종교배, 탈출구는 없다...
 
한국 사회에서 줄 뒤에 선 사람들에게는 출구가 없다. 강남을 중심으로 교육통계를 구성하면 통계가 왜곡되어 보이기는 하지만, 아버지의 학력으로 아들들의 대학진학률과 수능점수 같은 것을 가끔 검토한 자료들을 보면 무섭도록 높은 설명력을 보여준다. 어머니의 학력과는 큰 관계가 없고, 아직은 “집안의 돈”과도 통계적 변별력이 높지는 않은데, 아버지의 학력과 아이들의 대학진학 혹은 수능성적 같은 것은 높은 연관성을 보여주는 것 같다.
 
한국 사회는 지난 20년 동안 놀라울 정도의 동종교배 사회의 특징을 보여준다. 특정 몇 개의 학교, 특정 몇 개의 학군 혹은 특정 몇 개의 전공이 휩쓰는 상황은 중세 시대나 국민국가가 형성되던 국왕체계에서도 거의 보여준 적이 없다.
 
서울대 경제학과... 대선 후보로 우스운 모습을 보여주었던 정몽준에서 정운찬, 정운영과 같은 일련의 정씨들, 게다가 김근태까지 전부 이 과를 나왔고, 참여연대에서 재벌개혁의 깃발을 든 사람들도 거의 그렇다.
 
서울대 영문학과... 전국토를 영어학원으로 바꿔야 된다는 사람들이나 영어해야 잘 산다는 이데올로기를 30년 동안 만들었던 그 흐름이 맨 앞에는 서울대 영문학과들이 서 있는데, 그 반대편에서 민족문학 혹은 민족통일을 중심으로 서 있던 창비의 백낙청 선생이나 또 그 반대편에서 생태근본주의의 깃발을 들고 서 있는 김종철 선생도 한 때는 영문학도들이었다.
 
서울대 미학과, 찬란한 미학 실종시대에 나름대로 선방하는 중이다.
 
서울대 법대? 굳이 말할 필요도 없다.
 
연대 상대... “부실경제”의 대명사인 김우중이 그렇고, 한미 FTA의 선봉장에 선 외교부의 김종훈이 연대 상대출신이고, 소설가 김영하와 <대장금>의 작가 김영현도 그렇고... 나도 연대 상대 출신이다.
 
고대 법대? 찬란한 동종교배의 한 줄을 멋지게 채우고 있다.
 
이렇게 학맥과 연줄로 하나의 그룹들이 상층부를 형성하는 동안에, 건설자본과 금융자본 계열의 인사들이 또 다른 경제의 실질적 지도부를 만들고, 재무부 출신의 모피아와 경제기획원 출신의 이피아들이 열심히 싸우는 중에...
그야말로 민중들이 서 있을 곳은 한 곳도 없다. 이게 말만 좋아 좌파고 우파고, 보수주의고 급진주의니 그렇지, 사실상 친구관계와 선후배 관계로 따지거나 참여연대가 재벌분석할 때 즐겨 사용하는 “혼인관계”로 따져보면, 완전 신라시대와 다를 바가 없다.
 
2006년 대한민국, 성골과 진골 그리고 6두품이라는 말을 가지고 분석하는게 훨씬 빠를 것 같다. 고시 봐서 변호사 되어 봐야 6두품일 뿐이다. 그 위에는 켜켜이 진골들과 성골들이 먹이 피라미드의 윗줄들을 형성하고 있다.
 
말이야 바른 말이지, 한미 FTA 해봐야 성골, 진골 아니면 별로 이익 볼 것도 없고, 그야말로 6두품 이하의 “민중들”에게는 고달픈 삶 외에는 별로 없을 것 같다.
 
이런 구조에서 위를 올려다봐야 목이나 아플 뿐이니, 아예 자기 주변과 자기 밑을 향해서 민중들이 집단적으로 불편한 심기를 드러내는게 바로 “된장녀” 논쟁의 좋지 않은 점이다.
 
예수가 말했던가? “네 이웃을 사랑하라...”
 
이웃과 이웃이 서로 “너는 여자야” 혹은 “너는 남자야”하면서 민중들끼리 격한 공격성을 드러내거나 “선생님 월급 때문에 세상이 이래요”라고 하는 건 살아서 이 세상에서 볼 수 있는 가장 큰 슬픔이다.
 
6. 고정간첩 “깐수”
 
우리나라의 성골, 진골들이 가지고 있는 문제는 “실력”과 “성실” 그리고 “양심”이라고 할 수 있다. 프랑스나 영국의 학자와 지배층에 비하면 우리나라의 성골들은 성실하지 않다. 양심이야 말할 것도 없고, 프랑스 혁명 전통 위에 서 있는 “노블레스 오블리제” 같은 얘기들은 너무 고상해서 차마 갖다 붙이기가 어려워보인다.
 
그렇다면 실력은? 우리나라의 학자 중에서 개인적으로 가장 “실력”이 높다고 인문학자와 사회과학자들이 서슴없이 꼽는 사람이 바로 고정간첩 “깐수”, 정수일이다. 2002년에 나온 불후의 명저 <이슬람문명>과 <실크로드학> 혹은 <고대문명교류사>와 같은 책들은 정통 인문학의 역사적 접근의 백미 중의 백미이고, 15개 국어를 한다는 등, 우리나라에서 아랍권에서 중앙아시아까지 글을 제대로 쓸 수 있는 유일한 사람이라는 등, 혹은 돌궐, 거란, 말갈, 여진과 같은 한 때는 우리나라와 어떻게든 관계를 가졌던 중국 변방 문명에 대해서 종합적인 시각을 가진 유일한 사람이라는 등... 학계 내에서 정수일에 대한 평가와 그 이름 앞에 붙여놓은 수사들은 상상을 초월한다.
 
심지어는 이제 정수일이 은퇴하면 도대체 우리나라에서 이슬람 문명에 대한 글은 누가 쓸 수 있고, 실크로드에 관한 방대한 자료를 읽어줄 사람이 누가 있을까... 이런 변방국가의 언어를 읽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이 지금 우리나라의 인문학 위기에 다시 나올 수 있을까? 이런 걱정들을 학계 내에서 심심찮게 들을 수 있다.
 
간첩생활도 하고, 감옥에도 갔다 온 깐수와 비교하여 “나는 그보다 공부 잘 한다”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이 없다는 현재의 상황이 말해주는 것이 무엇일까?
 
동종교배로 사회의 온갖 상층부의 특혜와 단물을 만끽하는 지금 한국의 지도층은 부패했을 뿐더러 무능하다고 말하지 않을 수 없다. 자본주의든 사회주의든 혹은 그 어떤 시스템이든 상층부가 형성되는 것은 어쩔 수 없다고 하더라도, 이 무능한 집단들이 온갖 잘난 척은 다 하면서 사실상 죽어라고 일하는 사람들의 모든 단물을 다 뺏어먹는 동안에 어쩔 수 없이 경제 피라미드의 하단을 구성하는 사람들은 도대체 왜 자신들의 삶이 이토록 어렵고 피폐한지 이해할 수 없이, 스스로를 서로 괴롭히는 “아래로의 경쟁”에 빠져드는 셈이다.
 
깐수는 고정간첩일 뿐이다. 그렇지만 깐수 보다는 자신이 공부를 잘 한다고 나설 수 있는 사람이 지병으로 더 이상 글을 쓸 수 없다고 물러앉은 리영희 선생 외에 또 있겠는가?
 
7. 탈출구를 잃은 민중의 소망
 
자신의 미래가 어둡다고 생각하면 사람들의 삶은 피폐해지고, 정신세계는 참혹해진다. ‘재테크’니 ‘아파트 투기’니 혹은 ‘로또’니 아니면 ‘바다이야기’까지 본질은 비슷하다. “자신의 일은 자신이 하자...” 누구나 이런 것들이 자신의 삶을 구원해주지 않을 것이라는 것을 알고 있지만, 일단 서 있는 자리에서 한 발이라도 밀리면 “정글의 법칙”이 야만스럽게 작동하는 한국 사회에서 끝장이라는 것을 알고 있다.
 
제 정신을 가지고 살 수 있는 사회가 아니다. 규율에 따라 시키는 것들을 대체적으로 지킨 “선량한 양민”의 정신세계는 지금처럼 황폐한 적이 없다. 그래서 더 공격적이 되고, 뭐라도 걸리면 화를 퍼붓지 않을 도리가 없다.
 
‘된장녀’ 논쟁이 보여주는 사실은 단 하나다. 2006년 대한민국, 젊은 여성들에게라도 화를 퍼붓지 않으면 견디기 어려울 정도로 성골, 진골 그리고 6두품 외곽에 있는 “보편적 대한민국 국민”들의 정신세계는 세계 역사상 유례가 없을 정도로 황폐하다는 사실이다.
 
여성들에게 구조적 원한을 퍼붓거나 선생님을 “괜찮은 직업을 가진 안전한 생활인”으로 저주하는 일이 과연 동서양 민중사에서 존재한 적이 있었을까? 켈트족 신화, 북구신화, 미국의 건국신화 혹은 인디안이나 심지어 알래스카의 신화에도 이런 사례는 없고, 역사적으로도 거의 찾아보기 어려운 논쟁이다.
 
가장 유사한 사례는 15세기에서 16세기경 유럽이 처음으로 경제적 부를 축적하던 시기에 “마녀 신고건”이 급증한 적이 있었다. 새로운 경제적 시대로 전환되면서 교회가 자신의 힘을 유지하기 위해서 ‘마녀’에 관한 루머들을 퍼뜨린 것으로 사학자들은 추정하는데, 이 시기에 혼자 사는 노파 혹은 혼자 사는 소녀와 처녀들이 마녀라고 신고하는 사례가 급증하게 된다. 흑사병, 기근 혹은 인접 국가와의 잦은 전쟁들을 여성들의 탓이라고 주민들이 신고했던 적이 있기는 했는데, 이건 시장과 종교가 세상의 주도권을 놓고 벌인 마지막 한 판 승부 시기에 벌어진 일이다.
 
그런데 지금 한국은 그런 급격한 변화가 있는 것도 아니고, 이를 주도하면서 뭔가 지켜야 하는 교황청의 권력 같은 음모가 존재하는 것도 아닌데, 그야말로 민중들이 알아서 자신들 내에 “도덕적 희생자”를 찾아내는 형국이다.
 
그야말로 탈출구를 잃은 민중들의 분노가 갈 길을 잃고 스스로를 향하는 셈이다. 민중(people)이라는 하나의 실체(entity)가 존재한다면, 정신분열증적이며 자학적인 일탈이 벌어지는 것이라고 해석할 수 있다.
 
8. 공화국의 지배자는 따로 있다...
 
전두환의 5공화국을 거쳐서 지금은 6공화국을 우리는 살고 있다. 이 기간 동안에 청와대의 주인만 바뀌었지 실질적인 지배자는 거의 바뀐 적이 없고, 여러가지 형태로 근친상간을 일삼는 고결하신 지배층은 사람들의 시각 바깥에 따로 있다.
 
그냥 쉽게 표현하면, 한미 FTA 이후에 자신들의 삶이 급격히 좋아질 사람들이 바로 이 공화국의 지배자들이다. 겨우 현재 상황을 유지하거나 혹독하게 나빠질 것이 뻔할 사람들은 이 공화국의 지배자들이 아니다.
 
된장녀이든 고추장남이든 선생님이든 혹은 지율스님이든... 이들은 모두 공화국의 지배자가 아니라 민중의 한 가운데에 있는 사람들이다. 목까지 차오른 분노를 민중들이 또 다른 민중들에게 토해내고 있는 동안에, 웃고 있을, 베일의 뒤에서 행복한, 그리고 절대로 자신들의 힘을 조금도 양보하지 않을, 그래서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게 되는 것 자체를 가장 꺼려하는, 그들이 바로 공화국의 지배자들이다.
 
손가락질 하고, 의심하려면 그 지배자들을 의심해야 다음 단계로의 진화가 가능하다. 현재로서는 6공화국의 지배구조 청산이라는, 이번 판 stage clear의 민중들의 미션은, mission impossible이다. [e조은뉴스 기사제휴사=대자보]
기사입력: 2006/09/25 [09:05]  최종편집: ⓒ 호남조은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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