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는 대성공, 영화비평은 위기
영화 담론을 포털 공간에만 남겨둘 수 있는가
 
백건영 칼럼니스트
▲흥행 최고 대작 괴물  

그레샴의 법칙이 지배하는 영화판. 이 말은, 아름다운 것이 추한 것에 밀려나고 가짜가 진짜를 몰아내며, 위선이 진심을 협잡하는 행위나 현상이라고 달리 해석할 수 있다. 가까운 예로 스포츠 신문의 경우를 보자. 아침이면 지하철 혹은 버스에서 만나는 이 신문이 과연 스포츠 전문지인지 연예 가십지인지 구분이 되지 않을 정도라는 것은 거론조차 무의미하다. 선정성과 오락, 돈, 스캔들에 집착한 특종 지상주의에 의존한 결과물이지만 문제는 여기서 끝나지 않는다.
 
스포츠와 연예기사의 잡종교배는 종합일간지에도 영향을 미치기 때문이다. 물론 이 사회에 어두운 일이 범람하다보니 미담이나 밝은 기사를 쉽사리 찾을 수 없는 이유도 있겠으나, 일간지 역시도 의도적인 선정성과 충격기사의 대형화를 통해 독자의 시선을 끌려고 안간힘을 쏟고 있음을 부인할 수는 없을 것이다. 이러한 현상을 마냥 방치할 수 없기에 자체 심의기구가 있고 간행물윤리위원회라는 것이 존재하지만, 그럼에도 가장 좋은 방법은 시장의 기능에 맡기는 것이다. 다시 말해 독자에 판단에 맡기는 것이다. 물론 언론은 여론을 형성하거나 왜곡할 수 있는 힘을 가지므로 시장의 논리자체를 자기에게 유리한 쪽으로 호도할 수 도 있다. 그래서 또한 대안언론도 있고 감시기능의 존재가 필요한 것이며 그 임무를 수행하고 있기도 하다.
 
 제아무리 선정적이고 감각적인 것으로 승부를 하더라도 시장이 허락지 않으면 언젠가는 무너지게 되어있다. 이미 우리는 2000년도 초반 IT 벤처 열풍에 편승해 우후죽순 격으로 생겨나 수 백 개의 이르던 인터넷 성인방송이 지금은 대부분 정리되어 흔적도 없이 사라지는 것에서 교훈을 얻지 않았던가.
 
시장이 그릇이라면 기업, 혹은 매체는 그 속에 담긴 물이다.
 
 물이 제 아무리 요동을 친다한 들 시장을 넘을 순 있을지라도 그릇까지 뒤집을 수 는 없는 법이다. 하지만 그릇이 움직이면 바닥에 얕게 담긴 물조차도 단숨에 밖으로 쏟아낼 수 있다. 그래서 미동하지 않되 잠잠한 시장이 무서운 것이다. 혹자는 아담 스미스의 Invisible Hand 류의 고전주의 경제학 타령이냐고 할런지도 모른다. 그렇다! 적어도 정부나 국가의 간섭을 최소화하고 시장기능에 맡기는 것이 가장 옳은 길이라는 것이다. 어차피 위험수위를 넘어가거나 적절한 제제가 필요할 때 면 합법적 개입이 불가피해 질 테지만 그 전까지는, 자율성과 독립성을 보장해야 한다는 얘기이다.

 요즘 만나는 사람마다 영화비평의 홍수라고 말한다. 사실 이러한 주장을 부인할 어떠한 근거도 내게는 없다. 돌이켜보면 영화에 빠져 지내던 시절, 내가 아는 평론가의 이름이라고는 기껏해야 열 손가락에 꼽을 정도였으나, 현재는 이름도 생소하거니와 영화기자인지 평론가인지 대학교수인지 구분이 안 되는 이들로 천지에 가득한 지경이다. 또한 영화포털 마다 나름대로 자체 네티즌 평론가 또는 영화칼럼니스트를 양성하고 보유한 상황이기도 하다. (그렇다고 전문 비평가집단을 옹호하고 네티즌의 영화평을 폄하할 목적으로 이 글을 쓰는 것은 아니다.)
 
 네트 공간에서는 누구라도 자신의 글을 쓰고 발표하는 데 주저함이 없다. 하이퍼텍스트를 이용한 신속한 정보제공에서 파생된 한국 특유의 쏠림현상이 영화관객 천만시대를 가능케 했다는 점을 감안할 때, 영화산업 전반이 인터넷이라는 환경에 얼마간의 빚을 지고 있다는 점은 인정할 수밖에 없다. 이런 이유로 시대조류에 역행할 배짱이 아니라면 웬만한 영화계 종사자들 대부분이 블로그 하나쯤은 가지고 있는 실정이다.
 
이것이 21세기 한국사회의 생존법칙이기 때문이다. 동시에 영화마케팅 업체들이 인터넷포털과 클럽, 카페를 집중 홍보대상으로 선택한 것은 어제 오늘의 얘기가 아니다. 이렇듯 개인 블로그의 폭발적 증가로 인해 포털은 그 권력을 더욱 공고히 다지게 되었고, 네티즌의 마음을 사로잡는 소위 낚시 글이 횡횡하는 환경 하에서 진지하고 무거운 영화담론이 숨 쉴 곳은 사라져버렸다. 따라서 가볍고 이슈화에 적합한 글을 부각시켜 클릭수와 충성도를 높이려는 포털의 의도적인 전략은 영화섹션에서도 어김없이 빛을 발한다. 영화에 국한시키고 사적 경험에 비추어보자면, 인터넷 포털의 위력을 요즘처럼 절실하게 느꼈던 때가 또 있었나 싶을 정도이다.
 
 하지만 정말로 중요한 문제는, 매년 영화관객이 폭발적으로 증가하고 영화에 대한 글들은 도처에 널려있는 것과는 달리, 정작 영화예술 그 자체를 이야기하는 곳이나 사람은 찾아보기 드문 기현상이 벌어지고 있다는 점이다. 이를테면, 한국영화 관객동원 기록을 새로 쓴 <괴물>에 대하여 이야기하는 사람은 오늘, 지금 어디를 둘러봐도 찾아보기 힘들다. 이것은 차라리 한 편의 코미디이다. 흥행대작의 상황이 이러할진대 하물며 다른 영화들이야 오죽하랴. 불과 2개월 전 <괴물>의 기세 앞에서 머리를 조아리고 호들갑을 떨어대던 언론과 인터넷 포털은 무엇을 하고 있는가.
 
그들이 무작위로 배설해낸 영화 글들은 다 무엇을 위함이었다는 말인가. 상황이 이렇다보니 영화평을 쓰는 사람의 양적 증가와는 무관하게 비평의 질적 저하를 가져왔으며 한국의 영화평론은 하향평준화를 향해 내리막을 걸을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이 또한 양화가 악화를 구축하는 사례일 런지 모르나, 섣불리 속단하고 우려할 일은 아니며, 마치 인터넷이 영화비평계를 잠식한 양 호들갑 떨 일도 아니다.(나는 이 책임을 인터넷과 네티즌에게 떠넘기고 싶은 마음이 추호도 없다) 이것 역시 시장의 자정기능에 맡기는 것이 바람직 할 수도 있다. 왜냐면 시장은 정직하며, 다소 시간은 필요하겠지만 일단 옥석이 가려지고 진위가 판명되면 악화가 다시는 시장에 발붙이기 힘들기 때문이다.
 
 오늘, 지금 한국영화의 발전만큼이나 관객의 수준은 향상되었고 그들은 시장의 일원으로서 충분히 기능할 만큼의 소양을 지니고 있다. 그러하기에 나는 우리 관객과 시장을 믿는다. 어차피 시장은 악화가 양화를 구축하도록 언제까지나 내버려두지 않을 것임에 분명하다.
 
 천재가 사라지면 스타일만 남는다. 또한 시대정신이 사라지면 풍속만 남는 법이다. 문제는 시장이 기능하기에 앞서 스스로의 선택이 있을 뿐이다. 스타일을 선택하던 천재를 선택하던, 시대정신이던 풍속이던 각자 알아서 할 일이고, 그 결과에 책임 질 자세만 되어 있으면 된다. 그럼에도 영화를 네트공간에 맡기는 것은 솔직히 미덥지 않다. [e조은뉴스 기사제휴사=빅뉴스]
기사입력: 2006/10/07 [09:27]  최종편집: ⓒ 호남조은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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