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동산으로 갈팡질팡하는 대한민국
영화 귀신이 산다로 살펴본 부동산과 집의 의미
 
백건영 칼럼니스트
망국의 병’이라고까지 불리는 부동산 문제를 잡겠다는 정부의 의지는 확고하다. 그러나 연일 불거지는 정책실패로 인해 그 실효성마저 의심되고 있는 실정이다. 과연 집이 무엇이고 부동산이 무엇 이길래, 역대 정권들이 한 목소리로 다짐했건만 제대로 효과를 거두지 못하는 것일까. 우리에게 집이란 무엇인가. 원론적인 이야기로 시작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지금으로부터 삼십 여 년 전, 처음으로 산 집 대문에 당신의 이름이 적힌 문패를 걸면서 흐뭇해하던 선친의 모습이 아직도 눈에 선하다. 급속한 산업화와 도시화가 진행되던 이른바 압축성장의 시절, 고향을 떠나 대도시(주로 서울이었지만)로 흘러 들어온 가장들에게 있어 비록 조악한 슬레이트 지붕이나마 가족을 꾸릴 공간을 확보한다는 것은 자본주의 사회에서 살아갈 수 있는 능력을 보증해주는 일종의 자격 증명이었다. 이제 한 편의 영화를 보기로 하자.

대를 이어온 셋방살이 설움에 “네 집을 가져라”는 아버지 유언을 인생목표로 사는 박필기. 낮에는 조선소 기사로 밤엔 대리운전으로 투 잡스, 쓰리잡스를 뛰면서 결국 사회생활 10년 만에 대출에 융자까지 보태 거제도 바닷가 이층집을 사는데 성공한다. 이사 첫날 문패 박으며 온 동네 떠나가도록 울부짖었다! “아버지…나 집 샀어요” 한국인에게 집이란 어떤 의미인가에 대한 유쾌한 통찰과 조롱인, 영화 <귀신이 산다>의 시작이다.
 
 집의 소유는 인생의 목표였다
 
 귀신과는 절대 같이 살 수 없던 박필기, 아버지의 유언대로 내 집 장만에 매진해온 그에게 집이란 존재는 재산의 의미가 아닌 인생 목표 그 자체였고 소유만이 전부였다는 사실은 매우중요하다. 영화 <귀신이 산다>는 박필기와 연화의 집을 둘러싼 소유권 분쟁 과정을 통해 두 사람이 바라보는 집의 개념차를 극명하게 드러내고 있다.
 
 우리나라 사람들이 유독 집에 대해 강한 집착과 소유의지를 보이며 나아가 집을 재산증식의 수단으로 확장시키려는 배경은 농경사회로부터 그 원류를 찾아야 한다. 농경민족은 한 곳에서 정착생활을 하면서 집에 대한 소유의식 속에서 사회적 질서와 조화를 중요시 여긴다. 이에 반해 유목민족의 집이란 언제라도 허물고 다시 지을 수 있는 조립식 형태를 지향하며 그들에게 집이란 대자연에 맞서야 하는 보호막으로 인식되었다.
 
 집은 주거공간이자, 가족의 따스함이 서린 안식처이고, 자본집약적인 재산의 상징적 의미를 포함한다. 그러나 필기와 연화에게 집이란 색다른 의미로 새겨지고 있다. 즉, 주거의 개념도 아니고 재산증식의 목적도 아닌 오로지 내 집 마련을 통해서 남의 집 살이 설움을 떨쳐내고자 했던 박필기에게 집은 숙명적 연인이었고 인생의 화두였다. 하지만 집을 얻기 위한 각고의 노력과 집념이 서려있듯이 박필기가 산 집에 대한 애착은 귀신인 연화도 못지않다. 남편이 손수지어 준 행복과 신혼의 단꿈이 배어있는 그 집은 추억의 장소이고 사랑과 정이 배어나는 안락한 공간이기 때문이다.
 
 이렇듯 집이란 것이 한 사람에게는 소유의 개념이지만, 다른 이에게는 추억이 새겨진 공간으로 자리하고 있는 것이다. 그 집이 남에게 판 것이 아니라 불의의 사고인해 어쩔 수 없이 소유권이 넘어간 경우이기에 어찌 보면, 박필기가 주장하는 소유권에 대해 연화는 원인무효를 주장하고 있다고 볼 수 도 있다. 그러나 필기가 연화를 인정하고 그녀와 소통하면서부터 소유가 아닌 지켜야 하고 자신의 추억을 담아야 할 공간으로 집의 새로운 의미를 인식하게 된다는 것은 이 영화가 주는 숨겨진 교훈이다.
 
 부동산 문제 해결에는 인내심이 필요하다

 온 나라가 부동산정책 때문에 우왕좌왕하고 있다. 단칸 전세방을 전전하는 사람이 있는 반면, 수 십 채의 집을 소유하고 재산증식의 목적으로 이를 불려가는 이들도 있다. 모두 자본주의가 낳은 필연적 현상이기는 하다. 이러한 현상은 비단 우리나라에만 국한되는 것은 아니다. 그럼에도 집의 목적과 집이 가지는 소중한 가치들을 다시금 새겨볼 필요가 있는 것이다. <모래와 안개의 집>에 등장하는 베라니처럼 재테크 수단으로 집을 바라본 사람도 있고, <귀신이 산다>의 박필기처럼 내 집 마련이 평생의 숙원사업인 사람도 있을 테고 연화처럼 추억이 담긴 공간을 지키고 싶은 사람도 있을 것이다. 또한 가족의 안전과 평온한 보금자리를 위해 집을 소유하는 이들도 있다.
 
 그 어떤 목적일지라도, 적어도 자본주의하에서 집과 부동산은 단어 이상의 가치를 가진다. 단순히 추위를 피하고 비구름을 가릴 곳이라는 생활공간의 의미로부터 거주자의 문화적 자본을 집약적으로 표현하는 상징물로 집의 의미는 변화하고 있는 것이다. 고관대작을 비롯한 유명인사들이 사는 곳, 하다못해 인기연예인이 마약을 하는 장소라도 압구정동이나 청담동이라면 자연스럽지만, 강북 변두리 지역의 동네(특정 지역을 비하하려는 의도는 전혀 없음이다)라면 이상하거나 심지어는 코믹하게 느껴지지 않는가? 이미 집이 위치하는 장소는 단순한 행정구역의 명칭이 아니라 그 거주자의 학력·가정환경·재력 기타 등등 문화자본에 대한 상당히 많은 정보를 제공해주기 때문이다. 따라서 당연한 결과로 서울 주변에 신도시를 아무리 건설한들, 문제가 해결되지는 않을 것이다. 세계를 놀라게 했던 주택 이백만 채 건설사업의 효과란 고작 분당이라는 유사강남의 형성으로 이어졌을 따름이다.
 
 그렇다면 대안이 있는가? 우리 모두 집이 갖는 본래적인 의미로 돌아가자고 호소하거나, 보다 근본적인 차원에서 사회의 불평등을 줄여나가는 수밖에 없다.
 
어느 것도 매우 장기적이고 인내심을 요하며 쉽사리 성공하기 힘든 방법이다. 차라리 지금 이 순간에도 집 한 채 마련하기 위해 땀 흘리는 수많은 이들의 소박한 꿈이 하루라도 앞당겨 실현되기를 빌어주는 수밖에 없을지도 모르겠다. [e조은뉴스 기사제휴사=빅뉴스]
 
기사입력: 2006/11/07 [09:45]  최종편집: ⓒ 호남조은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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