된장녀 논쟁의 진실은?
명품 가치를 인정해야, 대부분 사람들은 편승
 
강명기 기자


▲색스 앤더 시티의 캐리는 명품의 가치를 알고 있다.  

 
된장녀 놀이, 패리스 힐튼 놀이의 논쟁이 한창이다. 왜곡된 남성들의 시선이 일부 여성들의 행태를 매도하고, 스타벅스 커피를 즐기고, 명품을 구매하며 모두가 ‘된장녀’로 곱지 않은 시선을 보낸다.
 
이러한 시선은 사실 필요없는 논쟁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왜곡된 시선 속에 왜곡된 놀이를 즐기는 이들에게 경각심을 심어줘야 할 때이기도 하다. 사실 “스타벅스 커피를 마시는 이들 중에 진정한 커피 맛을 느끼는 사람이 과연 몇이나 될까?”, “프라다, 루이비통 가방을 들고 다니면서 그 가치를 알고 느끼는 이가 몇 명이나 될까?”하는 질문부터 던져야 할 것이다.
 
이 질문의 답은 예상대로라면 그다지 많지 않은 숫자일 것이다. 이러한 된장녀 논쟁의 중심에 서 있는 “섹스 앤더 시티”는 분명 매도당하고 있다. 남성들에게, 일부 이런 놀이를 즐기는 이들 모두에게 본질이 파악되지 못하고 겉모양에만 집중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 드라마의 주인공 캐리는 구두마니아로 여러 구두 명품을 사는 취미를 가지고 있다. 하지만 그녀가 그 명품구두를 구입하는 이유는 남의 시선을 의식해서가 아니다. 다만, 그 명품구두의 가치를 제대로 인식하고 있다.
 
일례로 드라마 중간에 친구들과 함께 천사의 땅 로스앤젤레스에 갔을 때 소위 짝퉁 가방을 사기 위해 친구 사만다와 함께 먼 길을 떠났지만 그녀는 비닐에 싸여져 뒤죽박죽 진열되어 있는 가방을 보고 생각했다.
 
“비싸게 주고 사더라도 사랑하고 아끼는 것이 훨씬 더 좋을 것 같다”고 말이다. 이처럼 캐리의 명품구두 사랑은 진정으로 그 구두의 가치를 알고 자신이 원하는 바를 명확하게 인식하고 있다. 하지만 우리는 이 진실을 무시하고 그저 명품만을 좋아하고, 브런치를 즐기는 뉴요커. 이를 따라하는 여성은 모두 된장녀라고 말하고 있다.
 
또한 이를 즐기는 여성들도 캐리처럼 그것의 가치를 알지 못한 채 남의 시선을 의식하고, 자신을 과대포장하기 위한 수단으로 사용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우리나라에서 루이비통 가방이 대체 얼마나 할까? 알아본다면 기암을 하는 사람들도 있을 것이다. 가방 하나에 못해도 100만 원을 호가하니, 100만 원이 누구 집 개 이름도 아니고 놀랄 수밖에. 물론 우리나라의 경우 수입이 되면서 관세가 붙고 이것저것 더해져서 가격이 천정부지로 솟아 매장에 진열되는 것도 사실이다.
 
그래서 혹자는 외국에 나가면 명품을 구매하는데 혈안이 돼는 사람들의 심정이 이해간다는 이들도 없지 않아 있다. 이런 문제들을 뒤로하더라도 명품가방의 가격은 단지 원가만을 책정한 것이 아니다. 원가만을 책정했다면 당연히 그 가격은 있을 수도 없는 가격이다.
 
보통 패션 상품의 원가에는 인건비는 포함되지 않았다. 디자이너의 인건비, 영업하는 이의 인건비, 판매하는 사람의 인건비는 말이다. 결국 그렇게 판매가격을 올려 받아도 인건비조차 빼지 못하는 경우도 허다하다. 그래서 오히려 명품가방을 부러워하는 준 브랜드 회사들도 많다.
 
하지만 루이비통이 명품으로 인식되기까지는 오랜 세월이 있다. 또한 그 오랜 세월동안 이 가방을 들고 다니면 충분한 가치를 한다는 인식이 만들어졌다는 것이 포인트다. 그러한 인식이 함께 하지 않는다면 명품이 될 수 없다. 즉, 루이비통의 가격은 원가를 따지는 것이 아니라 가치를 따져 책정하는 것이다. 이를 우리는 고부가가치 산업이라고 한다.
 
결국 <섹스 앤더 시티>의 주인공 캐리는 이 가치를 인식한 바탕 아래 명품구두를 구입하는 것이다. 이 점을 우리는 인식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예를 들어 스타벅스의 창시자인 하워드 슐츠는 커피마니아로 진정한 커피의 맛을 내기 위해 노력했고, 그 결과 많은 이들이 스타벅스의 커피를 제1인자로 인정해준 것이다.
 
이것이 우리나라에서는 스타벅스 커피의 맛보다는 스타벅스 커피를 들고 다니는 멋에 취해 진정한 본질 따위를 생각하지 않고 그저 편승하고 있는 것뿐이다. 자신의 입맛에 커피2, 프림2 설탕 3의 다방커피가 맞는데도 교양인으로의 품위를 지키기 위해 원두커피를 내려 블랙으로 마시는 어줍지 않은 행동을 하고 있는 것이다.
 
결론적으로 우리가 말하는 된장녀나, 된장녀라고 비판하는 남성들 모두 명품과 스타벅스의 진실과 이면을 거짓으로 생각하고 있는 것이 이같은 소모적인 논쟁을 불러일으킨 것이다.
 
이 세상에서 다수에게 인정받는 일은 그리 쉬운 일이 아니다. 적어도 십 수 년이란 시간이 필요하고, 그 시간동안 다수에게 인정받기 위해 거듭 실패에도 불구하고 노력해야 하며, 그 노력이 결실을 맺어야 한다.
 
이것은 세상사는 순리와도 마찬가지다. 갓 태어나 아기는 몇 번으로 쓰러지고 또 쓰러진 뒤에 일어나, 아장아장 걸음마를 뗀다. 단지 아기의 노력이 눈에 보이지 않을 뿐이다. 또 걸음마를 시작하고, “어브바”를 수 백 번 외쳐야만 “아빠”를 말할 수 있다. 그렇게 시간이 흐르면서 성장하고, 성년이 되었음을 인정받는다.
 
이처럼 우리가 선호하는 명품들은 이러한 단계를 거쳐 탄생한 것이다. 이같은 진실을 믿어야 한다. 우리는 스스로 그 진실을 믿지 못하고 있다. 우리부터 우리 삶의 진실을 믿는 노력을 해야만 소모적인 논쟁이 자연스럽게 해소 될 것이다.
 
물론 이같은 논쟁은 한 번쯤은 있어야 할 필요성도 있다. 진실된 토론과 비판, 속에 공감대가 형성되고, 그것의 진실이 드러나게 되기 때문이다. 스타벅스의 커피의 멋뿐만 아니라 맛이 어떤지, 내 스타일인지, 곰곰이 생각해보길 바란다.
 
다방커피 종이컵과 스타벅스의 종이컵의 디자인 차이로 인해 남을 의식하는 거짓된 인간은 되지 말자. 또한 근거없는 비판과 편승에 힘입어 내는 목소리의 힘은 그리 강하지 않다. 진실된 비판이야말로 이 세상을 한 걸음 더 진보할 수 있게 하는 진정한 힘이라는 사실을 알아두자. 
 
기사입력: 2006/11/15 [10:41]  최종편집: ⓒ 호남조은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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