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대중은 보도연맹 강사였다"
鮮于綜源 변호사의 증언
 
趙甲濟 조갑제닷컴 대표

지난 10월9일 김정일이 핵실험을 한 이후 한국에서 일어난 가장 큰 변화는 예상 외였다. 김정일이 핵실험을 하면 그동안 對北굴종적 태도를 보여왔던 노무현 대통령도 일선을 긋고 대결자세를 취할 것이라는 예상이 일반적 관측이었다. 10월9일 오후 盧대통령도 그런 자세 변화를 강하게 시사했다.
 
"한국정부도 이 마당에 와서 포용정책만을 계속해서 주장하기는 어려운 문제 아니겠습니까. 효용성이 더 있다고 주장하기도 어렵지 않겠습니까.이와 같은 상황에도 불구하고 지난 날처럼 모든 것을 인내하고 양보하고 북한이 어떤 일을 하든 간에 다 수용하고, 이렇게는 해나갈 수 없게 된 것 아닙니까"
 
기자는 이 말을 듣고 나의 홈페이지(natizen.com)에 이런 글을 올렸다.
<위에서 말한 인식변화를 盧대통령이 행동으로 옮기는지를 지켜보아야 국민들은 속지 않게 된다. 盧대통령의 말을 믿으면 절대로 안된다. 그의 실천을 보고 판단해야 한다. 너무나 엄청난 태풍이 불어오니 여기에 맞서다간 날아가 버린다는 위기감에서 일단 피해보자는 뜻에서 한 변명일 가능성이 더 높다.
 
그는 우선 인책 인사를 해야 한다. 통일부 장관, 국방부 장관, 국정원장, 외교부장관, 청와대의 안보관련 참모들을 잘라야 한다. 청와대와 정부핵심 자리에 앉아 있는 386 주사파, 즉 ´김정일추종공산주의운동권 출신들´을 내보내야 한다. 이들이 국민들을 저주하고 미국을 공격하면서 對北굴종정책을 주도했기 때문이다.
 
노무현씨에 대한 국민들의 不信은 그가 김정일의 對南공작에 적극 호응한 배경에 대한 의문에서 출발한다. 핵개발, 韓美연합사 해체, 보안법 폐지, 연방제는 김정일 정권의 4대 對南적화전략이었다. 盧정권은 전폭적으로 이 4大전략을 지원하고 동조했다. 반역정권이 아니면 절대로 할 수 없는 일을 한 것이다. 이런 일들이 없었던 것처럼 치부하고 말을 만들어내어 국민들을 설득할 순 없다. 노무현의 과거정리가 필요하다.
 
금강산관광부터 중단시켜야 한다. 개성공단사업도 원점에서 재검토해야 한다. 국정원, 검찰, 경찰, 機務司에 특별지시를 내려 反국가사범과 간첩 등 내부의 敵들에 대한 감시와 수사에 전력을 다하도록 해야 한다. 그렇게 하는 것이 盧대통령 자신에 대한 의심을 다소나마 완화시켜줄 것이다>
 
盧대통령이 정책 전환을 모색하고 있던 10월11일 김대중 전 대통령은 전남대학교에서 한 강연에서 이런 말을 했다.
 
"북한의 핵 보유를 악의적으로 무시하고, 압박과 경제제재를 계속하면 북한의 도발을 조장하는 결과가 될 것입니다. 對北 포옹정책 그만두어야 한다는 해괴한 여론이 돌아다닙니다. 北核실험은 햇볕정책이 아닌 미국이 못살게 굴고 살 길을 열어주지 않고 있기 때문입니다. 北核실험을 두고 햇볕정책을 거론한 것은 타당한 주장이 아닙니다"
 
이는 누가 보아도 盧대통령에 대한 압박이었다. 과연 盧대통령은 기존의 對北굴종정책을 계속하기로 결정했다. 금강산관광도 계속하고 통일부 장관에도 이종석 현장관보다 더 왼쪽인 이재정씨를 내정했다. 한때 脫김대중을 모색했던 盧대통령은 김대중씨 집을 찾아가 점심식사를 함께 하는 등 굽히고 들어가는 모습을 보였다.
 
盧대통령이 급조했던 열린당이 스스로 수명이 다했음을 선언한 가운데 前現職 대통령이 결속하는 모습을 보인 것이다. 2007년 대통령 선거의 주도권을 김, 노 두 사람이 쥐게 되는 것이 아닌가 하는 말들도 나오기 시작했다.
 
권력을 쥔 현직 대통령과 유권자의 약25%의 여론에 큰 영향을 끼칠 수 있는 전직 대통령이 악수하면 한국의 좌파와 호남세력이 연계되어 막강한 표집단이 될 수 있다는 계산에서 나온 말이다. 문제는 노무현+김대중 연합세력이 김정일 정권을 선거판에 끌어들여 다시 從金정권을 만들어내려고 무리를 할 가능성이다.
 
김대중씨의 이념성향과 지역기반이 김정일의 對南적화공작과 결합된다면 한국은 지금의 말로 하는 내전적 상황에서 피를 부르는 내전상태로 갈지 모른다는 악몽이 생긴다. 애국행동단체에선 ´김정일+김대중+노무현은 핵개발 共犯이고 대한민국의 3敵´이란 표현을 쓴다. 일부 호남사람들은 김대중씨를 호남사람들 손으로 처벌해야 한다고 주장하면서 시위도 한다.
 
10월9일 핵실험 이후 한국의 국정방향을 對北굴종쪽으로 이끈 키 플레이어는 김대중씨이다. 그의 역할에 의해서 盧대통령은 돌아갈 수 없는 다리를 건너고 그 다리마저 불질러 없애버린 느낌이다. 김정일이 핵실험을 하면 대한민국 대통령은 당연히 한미동맹을 기초로 하여 유엔과 협력하여 대북압박과 제재에 적극적으로 나서야 한다.
 
盧대통령은 이런 결속이 요구되는 순간 결정적인 反美親北 노선을 취하고 만 것이다. 김정일, 김대중, 노무현 세 사람의 이런 노선은 필연적으로 이 세 사람을 공동운명체로 묶고 있다.
 
김대중씨의 연결고리 역할에 의해서 남북한 정권이 공조하여 국제사회, 미국, 그리고 대한민국의 헌법질서에 도전하는 형국이 조성된 것이다. 김정일에게 돈을 주고 약점이 잡힌 상태에서 합의한 2000년 6.15선언으로 한국사회에서 김정일 추종 좌익세력이 남북한 좌파정권의 지원하에 공개적으로 활동할 수 있도록 한 김대중씨는 두번째의 사변적 상황을 연 셈이다.
 
 여기서 크나 큰 의문이 생긴다. 김대중씨가 노무현 대통령을 끌어당겨 미국과 유엔으로부터 멀어지게 한 힘과 의지는 자기의 것인가? 아니면 김정일의 작용이 들어간 힘과 의지인가? 김대중씨가 보여준 김정일에 대한 이해할 수 없는 일방적인 태도는 단순히 굴종적이라는 말로써 표현할 성격이 아니다.
 
그는 지난 6월 방북을 추진하다가 김정일로부터 매정하게 거절당하여 국제적인 창피를 당했다. 그는 김정일에 대한 강한 유감을 드러내어야 할 입장인데도 그렇게 하지 않았다. 북한이 공개적으로 핵실험을 예고하자 김대중씨는 거의 매일 공갈치는 김정일을 편들고 미국을 비난하는 캠페인을 벌였다.
 
북한의 핵무장은 물론이고 심지어 6.25전쟁에도 미국의 책임이 있다는 식의 극좌적 역사관도 피력했다. 이런 사람이 과연 한국의 대통령이었나 하는 놀라움은 연속되는 놀라운 발언에 의해 희석되었다. 그
 
의 말대로라면 미국은 그의 생명을 두 번 살려주었다. 1973년 납치사건 때와 1980년 신군부에 의해 사형선고를 받았을 때. 그런 그가 미국에 대해서 김정일을 악의적으로 무시하고 못살게 굴어 핵실험을 하도록 했다고 공언했다.
 
미국의 동맹국인 대한민국의 대통령을 지낸 사람이, 더구나 노벨평화상을 받은 사람이, 미국에 대해서 ´악의적´ ´못살게´란 표현을 공개적으로 할 정도라면 김대중씨는 속으로는 미국을 원수처럼 여기고 김정일을 사모하든지 북한을 사상적 조국으로 여기는 사람이 아닌가 하는 의심을 불가피하게 만든다.
 
"김대중씨가 드디어 자신의 본색을 드러내었다"라는 말들이 나오기 시작한 지난 10월말에 기자는 鮮于宗源 변호사를 찾아갔다. 4년 전에 들어두었던 이야기를 확인하기 위해서였다.
 
鮮于 변호사는 해방직후의 좌우익 대결에서 오제도 검사와 함께 좌익 소탕에 앞장섰던 공안검사 출신이다. 그는 서울지검에서 근무할 때 補導연맹을 만든 사람이기도 하다.
 
여러 수사기관에서 같은 좌익사범을 돌려가면서 조사하고 무리하게 범인을 만들기도 하는 것을 본 공안검사들은 한번 수사를 받고 나온 좌익사범에 대해서는 신고를 받아놓고 더 이상의 수사를 하지 않도록 하는 제도를 만들었다. 1949년에 좌익前歷者의 신고를 받기 시작했다.
 
전국에서 20만 명 이상의 신고자가 있었다고 한다. 이들을 보도연맹으로 조직한 검찰은 경찰과 협조하여 교육을 하게 되었다. 보도연맹 설립자인 鮮于 당시 검사는 "공산주의자들을 전향시키는 데는 전향한 공산주의자가 강사로 나서는 게 좋겠다"고 생각했다. 鮮于 변호사는 4년 전 기자에게 했던 말을 되풀이했다.
 
"서소문의 배재학당이 있던 자리에 큰 느티나무가 있었습니다. 거기에서 교육을 하고 있었어요. 1950년 초로 기억됩니다. 전국에서 道별로 두 사람의 보도연맹원을 강사요원으로 추천받게 되었어요. 나는 전남북을 맡았는데 이때 전남에서 올라온 강사가 인상적이었습니다.
 
그가 공산주의 이론을 비판하는 연설을 하는데 어떻게나 청사유수로 잘 하는지 겁이 날 지경이었습니다. 눈이 새까맣고 얼굴은 통통한 사람이 참 똑똑해요. 첫 강의가 끝난 뒤 제가 그를 검사실로 불렀습니다. 그리곤 추궁했습니다.
 
´오늘 강의를 들어보니 의심이 간다. 최근까지 공산당 했던 사람이 그렇게 공산주의를 비판할 수 있나? 공산주의의 문제점을 알았다면 일찍 전향했어야 하는 것 아닌가? 자네는 정말 전향한 것인가?´
 
이렇게 물었더니 ´진심으로 전향했다´고 맹세를 하더군요. 그 뒤 이 청년을 강사요원으로 썼는데 아마도 6.25 때까지 서울에서 머물면서 보도연맹 교육에 참여했을 겁니다. 이 청년이 김대중씨였습니다"
 
김대중씨는 해방 직후 좌익 신민당에 입당하여 목포지구당 조직부장으로 활동했다. 1946년 전국적으로 번진 좌익폭동에 가담한 혐의로 경찰에서 조사를 받고 각서를 쓴 뒤 풀려난 적도 있다. 그는 신민당이 다른 좌익 2당과 함께 남로당을 만들 때는 가입하지 않았다고 주장한다. 그렇다면 왜 좌익전력자 조직인 보도연뱅에 가입하게 되었는가?
 
1980년 신군부에 의해 연행되어 조사를 받을 때 그는 이렇게 말했다.
 
"답: 보도연맹이란, 좌익단체에 가입 활동한 사실이 있는 자들을 가입시켜 선도하던 단체로 경찰서장 등 기관장들이 지도위원이며 위원장만은 우익계 인사이나 기타 맹원들은 좌익단체에 가입 활동한 자들이었던 바, 본인도 좌익단체에 관여했던 사실이 있어 同 연맹의 운영위원으로서 수차에 걸쳐 찬조금을 낸 사실이 있습니다.
 
문: 당시 목포시 보도연맹에는 어떤 인물들이 관여하였던가요.
 
답: 지금 기억되는 인물로는 초대 위원장 吳栽均, 2대 위원장 趙壽男, 부위원장 薛俊錫(남로당 목포시당 부위원장) 총무부장 金南喆(남로당원) 등이 있습니다.
 
문: 피의자가 위에서 진술한 2대 위원장 趙壽男의 진술기록에 의하면 피의자가 보도연맹의 총무부 차장직에 있었다는데 사실인가요.
 
답: 위에서 말씀드린 대로 본인은 同 연맹의 운영위원직에 있었던 사실은 있으나 총무부 차장직은 맡은 일이 없습니다. 당시 저는 해운회사를 自營하고 있을 때였는데 목포경찰서 사찰과 보도연맹 담당인 林春吉 경사가 저의 사무실에 수시 출입하며 형님, 동생하고 지내는 사이여서 보도연맹이 생긴다는 말을 듣고 저도 좌익단체에 관여하였던 사실이 있기에 해당이 될 것이라는 생각이 들어 나는 사업과 정치적 포부를 가지고 있는데 보도연맹에 가입이 되면 지장이 있으니 빼달라고 하였더니 『자네는 돈이 많으니 찬조금을 내는 운영위원이나 하라』고 하여 운영위원이 되었을 뿐입니다"
 
선우종원 변호사의 증언은 김대중씨의 주장보다는 趙壽男씨의 진술에 더 가깝다. 전남도 전체를 대표하여 강사로 추천될 정도라면 돈만 내는 운영위원이 아니라 보도연맹의 핵심인물이었다는 추리가 가능하다.
 
여기서 주목할 점은 김대중씨가 공산주의자들을 상대로 교육을 시킬 만한 이론무장이 되어 있었다는 점이다. 감상적으로, 즉흥적으로 좌익에 가담한 인물이 아니란 뜻이다. 그의 좌익 교육 前歷에 대해선 보다 구체적인 자료가 있다.
 
金大中씨는 자신이 좌익정당인 신민당 목포시당 조직부장으로 있던 시절의 同黨 상임위원급으로 權庠植 등과 같이 활동했다고 진술한 적이 있다.
 
이 權庠植이란 인물은 1971년 2월10일 다음과 같은 요지의 진술서를 수사기관 앞으로 작성하여 낸 적이 있었다(1980년에 軍 검찰은 이 진술서를 金大中씨 기소 자료에 덧붙여 재판부에 냈다). 권씨의 진술서에는 이런 대목이 있다.

<그 당시 좌익계 신민당 간부
위원장 李彩鉉/조직부장 및 선전부장 金大中
부원 金相培(현재 이북에 있음), 徐得均(사망), 張在赫(행방불명), 權庠植, 權五哲(이북에 있음).
 
그 당시 金大中은 새벽으로 공산당 교육을 받고 당 사무소에 와가지고 국제정세 및 국내정세를 말하고 나갔기 때문에 활동상을 잘 모릅니다. 1946년 10월 인민항쟁 이후 신민당이 해산되자 金大中이는 그 후 보니까 全南汽船 사장으로 근무하고 있다가 그 후로 金大中이가 금전관계 사고가 나자 共黨에서 제명당하였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여기서도 김대중씨는 좌익활동가들에게 교육을 시키는 존재로 기록되어 있다.
1980년 육군보통군법회의 검찰부에서 金大中씨를 기소하면서 법원에 제출한 증거자료에는 장금성이란 사람의 조선노동당 당원 등록 청원서 사본이 있었다.
장금성은 民靑을 거쳐 조선공산당에 입당했다가 조선공산당이 신민당(당수 白南雲), 인민당(당수 呂運亨)의 일부 세력과 합당, 남조선 노동당(당수 朴憲永)을 만들 때 따라갔던 사람이다. 그는 지하 활동을 하다가 6·25 직전에 전향한 좌익들을 敎導하기 위해 조직된 보도연맹에 가입했었다.
 
그는 6·25 남침으로 인민군이 목포에 진주하자 1950년 9월7일에 다시 조선 노동당 전라남도 목포시당 위원장 앞으로 당원 등록 청원서를 낸 것이다. 우리 경찰이 이 서류를 압수, 보관하고 있었는데 이 문서에 金大中씨의 이름이 등장한다. 청원서의 요지를 소개한다.
 
<1945년 8월15일 해방을 맞아 그달 19일 목포시 건국준비위원회 청년대에 입대, 9월20일경에 목포시 창평정 적색 로동조합 보안대 남부에 가입하여 치안확보에 노력하였으며, 1946년 6월16일에 민주주의 청년동맹 목포시 위원회 간부 김진강, 서득균, 김대중 동무들에게서 民靑 사업의 취지 설명을 듣고 이에 적극 찬동하고 民靑에 가입하여 1946년 20일에 민청 제22동 분회를 목포시 서산동 김판섭 동무 집에서 결성하는 데 참가하였고 맹원 획득에 주력하였음. 매주 3회씩 목포시 금화동 윤양신 동무 집에 강습 장소를 정하고 민청 목포시 위원회 위원장 송제경, 부위원장 김창균, 김대중 동무들에게서 교양을 받았으며 분회장 김판섭 동무의 지시에 의하여 1946년 9월23일 총파업 직전에 모든 선전투쟁에 참가하였음>
 
金大中씨는 합수부에서 軍 검찰로 송치된 후인 1980년 7월17일자 피의자 신문조서에서 『장금성은 모르는 사람이며, 民靑 목포시지부 부위원장이라는 직위를 가진 적이 전혀 없다. 본인이 부위원장이었다고 그 서류만으로 인정하기 곤란한 점이 있다』고 말했다.
 
軍 검찰은 그러나 장금성의 자필 기록을 받아들여 金大中씨에 대한 공소장에서 「신민당(후에 공산당, 인민당과 합쳐 남로당이 됨―편집자 注) 목포시 위원장이며 그 후에 남로당 부위원장으로 암약하다가 행방불명된 이채현의 권유로 위 신민당에 입당하여 조직부장으로 활동하는 한편, 공산계열의 행동전위대원 집단인 민주청년동맹 목포시 지부에 가입, 부위원장으로 활동하던 중」이라고 적었다.
 
장금성의 글에는 民靑 목포시 위원회 부위원장이던 金大中씨가 신민당 간부로서 조선 공산당원이던 장금성을 설득하여 民靑에 가입시키고 맹원들을 교육할 정도로 활동적이었던 것으로 나타나 있다.
 
김대중씨는 6.25 남침 전쟁이 터졌을 때 서울에 있었다고 한다. 그는 북한공산군이 우익 청년을 인민재판으로 처형하는 것을 보았다고 한다. 그는 1980년 중앙정보부에서 조사를 받을 때 자술서에서 이런 표현을 했다.
 
<많은 한국인들이 6.25를 겪어 공산주의의 실태를 체험함으로써 반공의식을 갖게 되었다고 보며, 역설적이지만 한국 반공의식의 최대앙양자는 김=일성과 공산군 바로 그들이라고 생각됨>
 
6.25 직후 서울에서 목포로 돌아온 김대중씨는 좌익前歷으로 해서 보도연맹 처형 때 국군에 붙들려갔으나 ´호명착오´로 살았다는 기록이 전한다. 한편으로는 북한군측에 붙들려 옥중에 있다고 인천상륙 작전 이후 감시가 소홀해진 틈을 타서 탈출했다는 자신의 증언이 있다.
 
[e조은뉴스 기사제휴사=독립신문]
기사입력: 2006/11/21 [08:44]  최종편집: ⓒ 호남조은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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