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극화란 탐욕의 실체이다
양극화 해소를 위해 세금을 없애자
 
박상준 기자
좌파, 우파, 중도파 등 세상을 시끄럽게 하는 정치판 용어가 판을 친다. 친일청산이니 하며 역사 청산을 외치며 과격함을 과시하는 자들이 판을 친다.  진보, 보수이니 하는 말들이 판을 친다. 대체 기준이 무엇인가! 기준의 잣대가 국민의 삶이 아니라, 과거와 미래가 아닌가! 

아담스미스는 노동생산성 및 전문성을 높일 수 있는 ‘분업’을 강조했다. 마르크스는 분업은 인간을 소외시키는 요소이므로, 분업의 철폐를 주장했다. 그런데, 분업의 철폐로서의 공산사회를 주장했는데 , 두 사람의 주장은 가장 중요한 요소인 ‘창의력’을 배제 시켜 놓은 것이다.  검증되지도 않은 불완전한 사상이 중국, 구소련 등을 비롯해 수천만, 수억, 수십억의 인간들의 삶을 반세기 이상 황폐화시켜버린다. 

인간의 창의성은 결국 인간의 노동력을 훨씬 뛰어넘는 도구를 개발할 것이다. 도구가 어떤 분야에서 인간이 했던 일을 대처하게 된다. 그것도 분업을 통해 인간이 해왔던 것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놀라울 효율(노동생산성)로 말이다. 그러면 노동생산성이란 명목 하에 단순한 일만 반복적으로 해온 분업적인 인간은 어떻게 되겠는가! 그들에겐 창의력을 개발할 기회가 박탈되어왔는데 말이다. 탐욕은 타인의 입장을 배려하여 더불어 성장하기를 원치 않는다. 단지 자신의 성장이란 관점에서 해석한다. 고로 관리자는 기계의 도입과 함께 낭비적 요소라 여기는 인간을 해고 시킨다.

대부분의 일은 기계가 대신하게 될 것이고, 창의적인 인간만이 간신히 쓸모에 의해 직업을 유지할 수 있다. 그리되면 기초 교육 및 심화 교육을 충분하게 받지 못한, 어쩌면 전혀 받지 못한 이들은 모두 또 다른 단순 노동 일자리를 찾아 헤매게 된다. 즉, 단순 노동력에 의존하여 삶을 유지하게 된다. 그리하여 경쟁도 심화되고 노동력은 헐값으로 거래된다. 물론 노동 강도도 오히려 높아진다. 재취업을 하기 위한 다른 기술을 익힐 기회가 제공되지 않는 한 그들은 고양이에게 몰려 막다른 골목까지 몰린 생쥐처럼 무모한 결정을 내릴 가능성이 높아지며, 또한 그런 상태로 몰린다.

지금 대한민국을 보면, 너무나 빈번히 주부, 중. 고등학생, 고학력을 지닌 여자, 여자라면 죄다 궁박한 처지에서 헤어 나오기 위한 수단으로 옷을 벗어 던져 몸을 파는 경향이 있다. 남자는 마치 먹이를 노리는 야수처럼 사기의 대상을 물색하고, 폭력의 대상 등을 찾아 헤매고 있다. 그러다보니 만연해진 폭력에 대한 향수마저 일으키는 저질 영화가 판을 칠 수 있는 환경을 마련해 주고, k-1이나 프라이드와 같은 폭력이 버젓이 음지에서 양지로 나와 수많은 인간들의 정신세계를 폭력에 대해 무감각하게 만들어 버린다. 결국, 더불어 사는 것보단 부의 분배의 과정에서 더 많은 부만 취득하면 된다는 식이다. 즉, 부당과 불화, 그리고 전쟁과 폭력의 위험수치를 높이는 길로 향하고 있는 것이다.

인간은 창의적인 일을 할 때  인간다움을 느끼고 만족을 느끼는 것이다.  공산사회란 인간의 가치를 인정하지 않고 동등한 분배만을 주장하는 것으로, 발전하기도 어려울 뿐만 아니라 결코 최종적으로 실현될 수 없다. 왜냐하면 인간은 탐욕이 강해 결국 어떠한 제도 하에서도 부패하게 되어 있다. 그러한 부패는 부당한 기득권층을 형성시킨다. 민주주의든 공산주의든 위와 같은 부패는 어떠한 수단을 통해서든 발생하게 되어 있다. (고로 국민 대다수의 의식을 성장시키는 방법만이 가장 효율적인 대처방안이다.) 또한 공산주의는 개인의 노동에 대한 대가로써의 소유권한을 물질적으로 인정하지 않기 때문에 결국 창의력 등을 비롯한 모든 노동력 발휘에 대한 동기를 약화시킨다. 소유할 수 없는 이런 사회(공산사회 등)는 결국 퇴보와 그 속에서의 부패와 맞물려 부패는 극에 달하고 빠른 종말을 맞이한다. 이와 같은 현상은 이미 공산주의를 추구했던 구소련이나 중국 등에서 알 수 있다.
  
한사람이 풍요를 누리기 위해 소비할 수 있는 적당량은 그다지 많지 않다. 또한 창의성이 배제된 육체적, 정신적 노동력으로 인해, 한 사람이 누리는 물질적 풍요가 대다수의 노동력에 비해 월등히 높아야 되는  당위성은 없다. 만약, 자신이 그다지 창의적이지도 않고 육체적으로 힘든 일에 종사하지 않으면서도 큰 풍요를 누리고 있다면 거기에는 부의 왜곡이나 전반적으로 모든 국민이 과학이 이룩한 극도로 증가한 생산량을 더불어 나눠 가지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부의 양극화가 극심한 이 사회에선 그 원인은 당연히 부의 불공정 분배로부터 기인한다.(그렇다고 소유한 것을 빼앗는 것은 오히려 불공정 분배보다 못하다. 공산주의의 부패가 결코 자본주의의 부패보다 결코 낫다고 할 수 없기 때문이다.)
 
가장 이상적인 분배는 과학의 발전이 인간의 노동력을 월등히 상회하는 잉여 노동력을 제공할 때, 그로 인한 과잉 생산의 분배는 다시 창의적 노동을 재창조하는데 재투자되고 그 잉여분이 전반적으로 국민들에게 골고루 나눠지는 것이다. 이것이 한배를 탄 이들의 운명을 더불어 엮어 주는 것이다. 이웃, 국가, 국민이란 호의적인 언어도 이와 같을 때 용인될 수 있다고 본다. 

회사의 CEO(경영자)의 노동 가치가 기계를 다루면서 생산에 투입되고 있는 노동자보다 특별히 더 많을 이유가 없다. 왜냐하면 두 사람의 노동은 결국 극도의 창의성이 결여된 정신적 노동이거나, 육체적 노동에 해당하기 때문이다. 고로 경영자에게 특별히 더 많은 부가 분배되는 건, 그들이 부의 분배를 관리하는 가장 근접한 자리에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자본주의가 올바르게 성장하기 위해서는 경영자의 가치관과 도덕심이 극히 중하다 아니 할 수 없다.

수레도 발명되지 않았던 원시시대로 거슬러 올라가 보자. 힘이 센 사람과 힘이 덜 센 사람이 나무를 베고, 사냥을 하는 등의 노동을 통해 얻어낼 수 있는 생산량은 아무리 많아도 겨우 한두 사람 몫의 차이 밖에 나지 않는다.  만약 누군가가 수레를 발명했다고 치자! 수레가 발명됨으로 인해 잠재적 생산량은 증대되었다고 할 수 있다. 왜냐하면 수레를 사용하면 한 사람이 과일 등을 채취하거나 할 때, 두 손에 쥘 수 있는 량의 수백 배에 해당하는 량을 채집할 수 있기 때문이다. (물론 생산량이 증가한 만큼 자원(평원의 과일 등)은 극도로 빠른 속도로 고갈된다. 따라서 또 다른 자원을 개발하기 위한 자본의 증대(창의적 연구)가 필요하다.) 그런데, 사람의 탐욕이란 빈번히 생산적 창의성에 발휘되는 것이 아니고, 비생산적인 곳에서 발휘된다. 누군가 수레를 개발한 사람에게 가서, 수레에 대한 모든 권리를 다 사버렸다고 치자! (이와 같이 탐욕을 실현시키는데 있어서 발휘되는 창의성은 창의성이 아니라, 독점이란 아이디어를 통해 탐욕을 실현시키는 방법일 뿐이다.)

수레를 빌리려고 수레 개발자에게 사람이 왔는데, 이미 누군가가 수레에 대한 권리를 다 가져갔다고 한다. 사람들은 수레 권리를 지닌 사람을 찾아간다. 수레에 대한 모든 권리를 지닌 자가 말한다.
“여러분들이 수레 가득 과일 등을 채집해 오면, 나는 여러분들이 전에 손으로 일했던 량보다 3배 많은 대가를 지불해 주겠소. 어쩌겠소. 내 수레를 빌려가겠소?”
사람들이 생각해보니까, 괜찮은 조건이라 생각하고 말한다.
“좋소! 내게 빌려주쇼.”
“나도 빌려주쇼.”

수레를 빌린 자들이 과일들이 무성한 평원으로 나가 엄청나게 수레에다 과일을 담는다. 수레를 빌리지 못한 자들은 몇 개의 과일을 손에 쥐고 어렵사리 과일을 따고 있다. 그런데 수레를 가진 자들이 엄청난 속도로 과일을 다 따버리면서 쭉쭉, 앞으로 나가는 게 아닌가! 지천으로 널려 있던 과일이 너무 빨리 고갈된다. 수레를 사용해 과일을 채집한 사람들은 수레 권리자에게 수레에 담긴 엄청난 과일을 몽땅 주고 나서 약속한 과일을 받아 집으로 간다. 나름대로 전보다 만족스럽다. 하루 이틀..... 시간이 흘러간다.

이젠 수레 없이는 하루 먹을 만큼 과일을 채집하기도 힘들어 졌다. 평원의 과일들은 엄청난 속도로 채취되었기에 거의 고갈 상태에 이른다. 생산성이 줄어든다. 수레를 사용해 과일을 따는 사람들은 점점 수레 가득 과일을 싣고 오지 못해 배당이 줄어든다. 중산층도 줄어든다. 수레가 없는 자들은 결국 삶의 질이 최하로 떨어진다. 사기, 폭력, 강도짓 등이 빈번히 발생한다. 모든 부(생산량)를 거머쥐고 있는 자는 불안하다. 거지같은 하층민들이 자신의 부를 노릴 것만 같다. 아무래도 경찰력을 통해 질서유지를 시켜야 할 것 같다. 질서 유지 군을 만들고 증원시킨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히려 더욱 더 범죄가 늘어난다. 더욱 더 불안하다. 아무래도 자신의 돈 관리를 금융을 통해 시켜야 할 것 같다. (한마디로 가해자와 피해자 사이에 짙은 연막을 치고, 불확실성을 증대시킨다.) 분명, 수레(과학 도구)의 발명으로 엄청난 생산량을 거두고 있는데도 불구하고 대부분 사람들의 삶은 하락하고 있다.  점점 복잡하게 사회구조를 만들어 누가 가해자이고 피해자인지 알 수가 없다. 탐욕을 충족시키기 위해 생산적이고 창의적 노동력을 통제하는데 더 이상 무리가 없어진다.

젊은 청년들이 열심히 공부를 한다. 한마디로 진리를 담고 있는 과학적 창의성을 습득한다. 자본을 지배하고 통제하고 있는 자들은 만족의 미소를 짓는다. 오직 경계해야 할 대상은 권력을 향해 치닫고 있는 고시 준비생과 정치 지망생과 같은 부류뿐이다. 이들에겐 약간의 후원만 해주면 된다. 장학금의 명목으로 말이다. 한마디로 탐욕과 탐욕이 만나 철옹성을 짓는 것이다.

자신들의 부를 유지해줄 소모품들이 계속 제공되는 한, 그들은 모든 걸 거머쥘 수가 있다. 창의적 노동력은 그들을 궁핍한 처지로 만들어 쥐어짜면 되고, 성욕 등과 같은 탐욕은 젊은이들을 돈에 허우적대다 나락에 떨어지게 만든 다음, 접근하여 거저 거두면 된다. 궁핍한 처지에 있는 사람들에게 고금리로 대출을 해주면 곧바로 그들은 나락으로 떨어지게 되어 있다.(어차피, 저급 노동력을 고급 노동력(자본)으로 성장시킬 생각은 없다. 오직, 저급 노동력은 탐욕을 충족시켜줄 대상이다. 즉, 먹이감일 뿐이다.)  그리되면 탐스러운 여자들은 아무 때나 돈만 거머쥐면 옷을 벗을 준비가 되어 있고, 젊고 힘 있는 청년들은 돈만 거머쥐면 불길마저 불사할 자세로 충성을 바칠 것이다.

그나마 처지가 괜찮아 보이는 의사의 예를 들어보자! 의대를 졸업했다. 돈은 없다. 분명, 그들에겐 당당히 일할 환경이 제공되어야 한다. 그러나 돈이 없다. 돈이 자본이라고 여겨지는 세상에선 돈이 있어야 한다. 그러나 실질적으로 돈은 자본이 아니다. 자본과 자원에 대한 나름대로의 정의는 나중에 논하기로 하자. 그러면 누가 자본인가?  무엇이 자원인가? 바로 의사와 같은 부류가 자본이다.(판사와 검사는 결코 자본적 가치가 없다. 고로 판사와 검사, 변호사 등은 법률 서비스라는 노동을 제공하고 남는 부의 분배를 받는 처지에 있는 입장이다. 이들의 소명은 고로 질서유지 및 창의적 노동력을 보호하는 것이다. 물론 질서유지가 정의적 관점에서 실현된다면 자본의 성장에 도움이 될 것이다.) 자본이 바로 인류의 미래를 결정하는 것이다.(물론 가장 큰 자본은 연구과학자이다.)

즉, 의사의 노동력은 수십~수백 명의 노동력과 동일하며, 그들이 의료 활동이 아니라, 연구 활동에 매진하면 수천~수만의 노동력과 동일하게 된다. 잠재적인 노동가치는 무궁무진하게 될 수도 있다. 즉, 의사는 단순 의료행위만 할지라도 수백 명에 해당하는 자본에 속한다. 그러나 누가 의사에게 병원을 지어주고 누가 의사에게 의료기기를 무상으로 제공해주는가? (이와 같은 제공은 당연히 국가가 해야 할 일이다.) 바로 이때, 금융업자들이 달라붙는다. 그들이 열심히 일하는 행위가 농부가 쌀을 거두는 거와 같다면 적어도 한 사람 분의 노동을 하였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만약 그들의 노동이 타인의 잠재적 가능성을 훼손하는 행위라면 한 사람분의 노동을 했다고도 할 수 없는 것이다.

“의사양반 연 6%에 5천만을 대출해 줄께! 최고 3억까지도 대출해 줄께! 빌려 써.”

나름대로 최상의 조건이라 여긴 의사는 얼씨구나 좋구나! 하고 돈(결코 돈은 자본도 아니며, 자원도 아니다.)을 빌려 쓴다. 왜냐하면, 의사는 경제. 금융적 속임수를 간파할 만큼 속임수를 연구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지금의 금융은 허구한 날 농사만 짓는 농부에게 친일파, 빨갱이를 외쳐대거나 좌파, 우파를 외쳐대며 광기로 국민을 자신들이 원하는 방향으로 통제하려는 정치 모리배와 하등 다를 것이 없다.

그러하기에 의사는 마치 자본을 빌리는 것처럼 돈을 빌리게 된다. 과연 의사라는 자본이 최고의 자본(의학 연구자)으로 성장할 수 있을까? 다시 한번 언급하자면, 우리가 알고 있는 모든 경제학은 속임수에 불과하다. 탐욕의 정체를 위장하여 자본을 통제하고 자본을 길들이며 자본을 강취하고자 하는 수단에 불과하다.

속임의 경제학에 대해 전혀 훈련받지 못한 의사가 어찌 세상물정 모르면서도 병원의 경영에 성공하기 쉽겠는가! 결국 은행 빚을 갚다가 정신없이 일만 하게 된다. 한마디로 연구 자본의 가치가 지속적으로 상실되어 가고, 병든 환자와 돈 사이에서 존엄에 대한 가치관마저 점점 희박해져 간다. 그러함으로 인해 의사는 정신적 고결함마저도 잃게 되고 인간 속에서 영혼을 살찌우거나 존엄을 추구하는 질적 가치보다 물질적 풍요와 같은 양적 가치만으로 만족하게 된다.( 따라서 의사는 돈을 많이 버는 직업으로만 대우를 받게 된다. 자본을 통제하고 지배하려는 세력에 의해 고급 자원에 속하는 의사의 가치는 점점 상실되고 결국 자본을 통제하고 지배하려는 세력의 흉내를 내는 겉모습을 지니게 된다.)

어떤 경우는, 순간적으로 제때에 갚던 대출이자를 갚지 못하는 상황에 직면해, 갑자기 은행에서 연체이자를 적용해 버린다.  연체이자를 적용시키는 은행의 미소를 본적이 있는가! 극도로 고급 자원을 완전히 소유할 수 있는 수단이 바로 연체이자의 역할인 것이다.  한번 금융이 미소 지을 때마다 완벽하게 평생을 노예로 살아야 할 국민들의 수가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난다.(고로 5년에 한번씩, 모든 채무는 전부 면제해주는 제도가 필요하다. 이와 같은 주장을 하면 말도 안 된다고 하는 사람도 있겠지만, 결코 그러하지 않다. 한때, 나는 몇 가지 경제변수를 넣어 편미분시스템을 만들어 결과를 도출한 적이 있었다. 채무완전 변제 시스템이 5년을 주기로 행사될 때마다 부의 분배가 공정해지고 경제 성장이 급속화  되는 결과가 나왔다.)

고로 의사도 속임이 판치는 이 나라의 경제학을 배워야 하고, 과학자도 배워야 한다. 이런 시스템은 자본의 가치가 크게 상실되고, 줄어든 자본이 생산해 내는 생산량이 최종 분배량이 되는데, 이 분배량은 어찌 되었든 대부분 자본을 통제하는 자들이 모두 차지해 버린다. 결코, 그들(자본을 통제하는 자들)의 노동력이 그렇게 많은 부를 향유할 어떠한 이유도 없는 데도 말이다. 이것이 과연 제대로 된 세상인가! 신 봉건주의이며, 신 농노제도(노예제도)인 것이다.

카드업체, 보험업체, 은행업체 등 모든 금융은 그런 것이다. 결코 사람을 살리는 게 아니며, 더불어 사는 게 아니다. 금융업이란 생산적이고 창의적인 노동력을 통제하고 지배해야만 살아남을 수 있는 구조를 갖추고 있다. 그들은 가난한 자들에게 고금리로 대출을 해주고, 완전히 그들의 삶을 끝장내 버린다. (합리적 이성이 있다면, 가난한 자들일수록 능력이 적기 때문에 저금리를 넘어 마이너스 금리로 대출을 해줘야 한다. 물론 일정한 액수로 말이다. 그래야 그들의 자본 가치를 성장시킬 수 있고 자립시킬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오히려 세상은 역으로 돌아가고 있으며 그걸 정당하다고 생각한다. 가난한 자들에게 고금리로 대출을 해주면 결국 너무 쉽게 그들의 인생이 끝장나게 되어 있는 것은 이미 현실로 나타나 있지 않나! 세상은 가난한 자들을 자립시킬 의지가 없는 것이다. 과학에선 모순이 드러나면 곧바로 모든 걸 원점으로 돌려 다른 해결점을 찾지만 부의 분배와 관계된 인간사회에선 그러하지 않는다. 바로 인간이 인간을 지배하기를 원하는 탐욕 때문이다.)

은행이란 타이틀로 이자를 갚지 않는 자들에게 원금과 이자를 회수하기 힘들면, 한번 건너뛰고 두 번 건너뛰어 결국 폭력도 불사하는 영세 대부업체(보통, 폭력배들이 운영하는 대부업 등)에 위탁한다.  알고 보면 은행과 폭력조직(영세대부업체)은 아주 밀접한 관계가 있다.

메이저 리그 선수들이 받는 연봉을 생각해보라. 기업을 경영하는 자들은 관중들에게 받은 입장료로 엄청나게 선심 쓰듯 수백억대의 연봉을 선수들에게 제공한다. 과연 분배의 우선순위가 제대로 된 걸까? 국민이란 소비자의 풍요는 과학으로부터 비롯되었다. 고로 국민이 소비하는 요소들은 창의적 활동에 재투자 되어야 스포츠 등과 같은 풍요를 즐기면서도 일(Work)을 했다고 할 수 있다. (만약, 미래를 위해 일을 해야 함에도 불구하고 현재 즐기고 있다고 생각해 보라! 그러하다면 결코 편안하게 즐길 수 없으리라. 고로 인간은 즐길 때도 즐거움의 대가로 지불하는 요소가 생산적인 일에 재투자돼야 함을 알아야 한다. 그래야 더불어 잘 살 수 있기 때문이다. 창녀에게 투자된 돈은 도박, 허영, 술, 담배, 유희 시장에서 겉돌다 자본의 성장(연구에 투자)에 어떠한 기여도 하지 않는다는 점을 상기시켜 보자. 즉, 메이저 리그 선수들이 상상불허의 연봉을 받는 것도 부를 왜곡 시키는 요소에 속한다. 이러한 불합리함이 있는 메이저 선수들마저도 엄청난 가치를 인정해 주는데, 막대한 자본에 속하는 황우석의 가치는 너무 쉽게 버려졌다. 결코 돈은 자본이 아님을 다시 한번 상기시켜 주기 바란다. 자본이 자본으로서 역할을 하고 있을 때, 사회에서 일어나는 불합리함이 상쇄된다는 것이다. 즉, 황우석 박사와 같은 연구자들이 어떠한 상황에서도 연구를 지속하고 있을 때, 중산층을 비롯한 국민들의 부가 지켜질 수 있다는 것과 같다.)

즉, 아무리 뛰어난 운동선수라도 한사람 이상의 생산적 노동에 기여할 수는 없는 것이다. 그들이 이룩할 수 있는 것은 스포츠를 즐기고 명예를 높일 수 있다, 또한 부의 올바른 재투자를 유발시켜 더욱 큰 생산량을 늘려 국민들의 삶이 더불어 잘 살 수 있도록 기여할 수 있다. 물론 자신에게 더 많은 투자와 관심을 얻어낸다. 즉, 일부 야구선수만 야구를 할 수 있는 게 아니라, 풍요 속에서 수많은 야구선수와 야구인들이 돈을 벌며 즐길 수 있게 되는 것이다.

다시 한번 예를 들어, 국민에게 세금 1조를 걷어 일자리를 창출한다는 명목으로 1년마다 멀쩡한 도로를 파헤쳐 상하수도 공사를 한다고 치자! 노동을 한 사람이 진정으로 일을 했다고 할 수 있나? 아니면 단지 삶을 연장했다고 할 수 있나? 창의성이 결여된 노동은 결국 순간적으로 끝나고, 늙거나 병들어 육체적 능력이 떨어지는 순간, 모든 것을  잃어버린다.  이들의 노동력은 기껏해야 한사람 분의 노동력이며, 생산력에 기여하는 바가 전혀 없다. 그런 점에서는 유명 축구선수도 매한가지이다. 그러나 틀린 점이 있다면, 그들에게는 명예가 주어지지 않는다는 것이다.

대한민국에서는 창의성의 최고봉이라 할 수 있는 과학소설이 거의 없다. 고로 본인이 쓴 과학소설을 예로 들겠다. 독창적 창의력의 가치를 지닌 ‘우주의 항문 화이트홀’ 이라는 과학소설을 완전히 컴퓨터 그래픽으로 제작하는데 2000억이 투자되었다고 가정해보자. (물론 이와 같은 투자는 무상으로 지원되는 것이 바람직하다. 투자는 선순위며 분배가 후순위인 것이다. 이와 같은 사상은 결국 얼마든지 삶의 패턴을 바꾸고 경제 시스템을 바꿀 수 있다. )  2000억은 컴퓨터 그래픽 영화산업이라는 시장을 만들고, 고급인력을 양성시키고 일자리를 창출시킨다. 더불어 수조원에 이르는 돈을 회수하여 창의적 산업에 재투자 될 것이다.
즉, 이미 양성된 영화산업 고급인력은 더 많은 창의성을 구현해 낼 수 있으며, 후진들을 양성시켜 배출 시킬 것이다.  즉, 자본이 자본을 낳은 것이다. 2000억을 들여 반지의 제왕 같은 판타지 영화처럼 수십 조 원을 회수 하지 못하거나 오히려 2000억 마저도 회수 하지 못했더라도 결코 손해가 아니다. 국가는 2000억원을 투자해, 무궁한 가치를 지닌 컴퓨터 그래픽 영화 산업을 키운 것이다. 1조원을 버려 땅을 파헤친 것이 아니다. 왜냐하면 생산력과 생산량은 자본의 량과 일치하기 때문이다.(돈과 생산량은 완전히 무관한 것이다. 따라서 잘사는 나라는 고도의 창의적 인재가 포진되어 있는 나라다. 빚 덩어리 나라, 미국이 왜 전 세계 국가 반절의 국력과 맞먹을 부와 국력을 지녔겠는가? ) 그러나 폭력, 섹스 영화를 만드는데 100억을 투자하여 수천억의 이득을 냈다면 어떨까? 그것은 폭력영화가 국민의식을 폭력에 무감각하게 하는데 일조할 것이며, 전체적으로 폭력성향의 증가는 자본의 가치를 떨어뜨린다. 고로 수천억의 이득은 부당한 부의 분배 과정을 거친 것이며, 자본의 가치를 끊임없이 떨어뜨리게 한다.  물론 그러한 행위가 반복되면 부의 왜곡이 심화되고 결국 국가가 파탄에 이른다.   

부의 분배가 잘못되어 온 ‘자본주의’라 칭해지고 있는 지금의 사회를 살펴보자. (물론 여기서 불리는 자본주의는 극도로 왜곡된 자본주의며, 짝퉁 자본주의라고 칭할 수 있다. 왜냐하면 자본에 대한 정의자체가 극히 왜곡되었기 때문이다.)

10여 년 전의 물류(택배)회사를 살펴보면, 물류센터에서 단순 노동하는 노동자들의 수익이 일당 7만~10만원에 이르렀다. 그 당시는 물건을 보내면 일주일이상은 되어야 도착한다. 왜냐하면, 고객으로부터 택배물을 모아서 물류센터에서 다시 보낼 장소별로 재분류를 한다. 그리하다 보면 사람들이 손수레에 짐을 담고, 송장을 손수 쓴다. 오랜 시간을 일하면서도 짬이 많고, 수많은 사람들이 일을 한다. 그러나 자동화기기를 도입된 후부터 어떻게 되었나?

경영인이나 회사의 오너(소유자)는 자동화기기(컨베이어 벨트, 바코드 인식기 등)를 도입하면서, 곧바로 초기투자 비용을 뽑으려 한다. 아니, 더 많은 이득을 취득하고 싶기 때문에 기계가 내는 효율적인 노동력에 대하여 욕심을 낸다. 즉, 수많은 사람들을 잘라 버린다. 더 이상 수많은 사람들이 손수레로 짐을 실어 나를 필요도 없고, 송장을 볼펜으로 직접 쓰는데 시간을 낭비시킬 필요도 없다. 기계의 도입으로 인건비를 팍, 줄여버리면서도 더 많은 이득을 거둔다. 이게 정말 올바른 부의 분배인가? 아니면 인간을 노예로 전락시키는 인간의 탐욕인가?

기계를 도입함으로 인해, 회사는 지속적으로 더 많은 이득을 낼 것이다. 그런데 왜 경영자와 소유자는 기계의 도입으로 인해 넘쳐나는 노동력에 대해 질적 상승을 도모하지 않는가! 육체적 노동은 결국 한사람의 노동가치 만을 가질 뿐이며, 나이가 들고 육체가 쇠약해 갈수록 노동생산성도 떨어져간다. 즉, 회사는 기계의 도입으로 넘쳐나는 노동력으로 인해 주어지는 노동자의 여유가 그들의 삶과 그들의 자본능력을 증진시킬 수 있도록 도와줘야 한다. 더불어 성장하는 것이다. 정신적 여유와 물질적 여유, 그리고 교육을 통해 자본의 가치가 증가한 노동자는 더 나은 자아실현을 위해 떠날 것이다. 이것이 바로 자본이 자본을 낳은 것이다.

그러나 한국의 경제는 어떻게 성장해 왔는가? 완전한 착취였다. 물류시장은 2000년에서 2004년에 4배 수익이 증가하였고, 계속해서 커져왔다.  기계의 도입으로 수요와 공급의 법칙에 의해 불필요하다고 여긴 노동자들을 모두 해고시키고, 극소수의 노동자에게 전보다 더 많은 노동을 요구한다.(경영자나 노동자나 모두 한사람분의 노동을 하는 입장에 있다. 즉, 소수가 다수의 희생을 통해 막대한 부당한 이득을 추구하는 것이다.)  지금 물류센터에서 일하는 노동자는 일당 4~5만을 받고 야간에 10~12시간을 쉼 없이 일한다. 이곳에서는 노동법이 전혀 지켜지지 않는다.

경동택배와 같은 곳에서는 매연과 지게차나 탑 차 등과 같은 위험요소에 의해 사람이 죽어나가거나 커다란 신체적 손상을 입는다. 현대택배와 같은 곳은 야간 근로를 12시간 상회하곤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최악의 조건에서 일하는 노동자들이 침묵하고 있다. 왜 일까? 모든 것이 약육강식의 세상이 바로 대한민국이다. 기계는 멈추지 않고 물품을 토해내고, 인간은 기계의 동작에 맞춰 짐을 내리고 실어야 한다. 지금은 잊혀져가고 있는 눈물로 차별철폐를 호소하던 비정규직 KTX 여승무원. 냉정한 법의 해석. 더욱 더 알 수 없는 건, 철도 서비스 제공을 왜 젊은 여자로만 뽑는단 말인가? 남녀 차별이며, 나이 차별이며, 온갖 사항에서 차별이다. 서비스를 따스한 온정보다 말랑말랑한 탄력 있는 여성의 몸뚱아리로 제공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사회. 그런 사회에 일조해 처음엔 자랑스럽게 KTX 여승무원이 된 젊은이들. 어디에도 탐욕은 있어도 배려는 없다. 무엇이 옳고 무엇이 그르단 말인가! 따로 지옥이 있겠는가? 이것이 지옥이 아니고 무엇인가!   

마르크스가 전 세계를 한번 말아 먹었고, 아담스미스나 케인즈, 통화주의 등과 같은 경제 사상들에  의해 부의 분배의 왜곡과 양극화가 극심해 졌다. 자본(창의적 노동력 등)을 통제하는 이들의 게걸스런 탐욕을 채워 주는 도구로 큰 역할을 한 것이다. 그로인해, 자본(창의적 인간)은 자본 노릇을 하는 거짓 자본(돈)에 의해 완벽하게 통제되고 지배되어 왔다. 자본의 가치가 지속적으로 감소하고 있는 상황에서도 그들은 결코 자신들의 탐욕의 량이 전보다 줄어들기를 원치 않기 때문에, 결국은 감시자가 노예를 채찍으로 재촉하듯, 온갖 세금, 금융 등의 시스템을 복잡다기하게 동원해 인간의 정신을 메마르게 완벽하게 통제해 왔다. 결국 탐욕스런 인간이 대부분의 인간을 지배해 온 역사는 아직도 반복되고 있는 것이다.

이제, 대한민국에서는 납세의 의무라는 사상을 통해 세금을 걷는 대신,  납세를 받을 권리라는 사상을 통해 세금을 받는 사상이 일반적으로 통용되어야 한다. 즉, 세금이란 용어가 국민이 내는 돈이 아니라, 국가가 국민에게 주는 돈으로 의식 전환이 되어야 한다. 과거의 어리석은 탐욕적이고 비합리적인 사상으로 현재와 미래를 결정지을 것인가! 최고의 합리성을 자랑하는 과학적 사고력은 결코 이미 거짓이라고 판명된 사상에 대해 고려하지 않는다. 일할 나이가 된 청년들에겐 국가가 집을 무상으로 제공해줘야 할 의무가 있으며, 또한 청년들은 집과 일할 도구를 의무적으로 받을 권리가 있는 것이다. 이리하면 어찌 나라가 제대로 운영되겠는가? 하고 나에게 반문할지 모르겠다. 그러나 그것은 고정관념일 뿐이다. 모든 논리의 완벽함과 수치적 결과가 무엇이 우리가 선택해야 할 길인지 밝혀 주리라 본다.    
기사입력: 2006/12/18 [11:12]  최종편집: ⓒ 호남조은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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