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 지
 
정성수


봄 편지:
내가 그대를 만난 것은 봄동산에서 꽃을 보고 웃다가 우연히 그대와 서로 얼굴이 마주치자 괜시리 겸연쩍고 부끄러운 사소한 일로 시작되었다. 봄이 이렇게 내 가까이 있음에도 그걸 모르고 투정으로 보낸 세월에 머리를 숙인다. 지금 그대를 만난 것이 모두가 봄의 향기 때문이라는 것을 알았다.

여름 편지:
진실로 그대를 사랑하는 까닭은 한 철 동안 화려하게 피었다 시들어 버리는 그런 사랑 말고 저무는 들녘의 유장한 강물처럼 오래토록 변치 않는 그런 사랑으로 남기를 바라는 그대의 소망을 위해서이다. 그 소망으로 그대를 오래토록 붙잡아 두고 싶다.

가을 편지:
길가의 풀꽃만 봐도 눈물이 난다. 그대와 함께 바라보던 바다로 지던 해도 어디론가 사라져 달마다 한 번씩 그믐달로 와 내 가슴을 쥐어뜯는다. 텅빈 들녘의 허수아비도 논두렁에 주저앉아서 하늘을 본다. 이 세상 어디에도 그대는 없어 이제 누구를 위하여 남은 휘파람을 불어 주어야 할까. 온기 없는 달빛이 빗살로 빈 들녘에 꼿여 서서 죽는다. 아, 울고 싶다.

겨울 편지:
겨울 한 가운데 있어도 보리는 더욱 푸르고 어딘가에 키 작은 풀포기들도 이 겨울을 참아 내고 있을 것이다. 눈보라 속에서 눈을 크게 떠야 파란 봄이 오듯이 내 사랑도 어드메쯤인가 이 겨울을 잘 견딜 것을 믿는다. 겨울은 깊이 침잠하고 땅 아래 봄은 세상 밖으로의 꿈을 꾼다. 아직은 한 겨울이다.
기사입력: 2005/03/10 [00:00]  최종편집: ⓒ 호남조은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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