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제우의 동학란
 
최훈영 기자

혁명가가 나올 때가 되었습니다. 이러할 때 임금이 승하했습니다. 춘추가 33이었습니다. 독살된 것이 아닐까 하는 의혹이 었습니다. 승하 후 장김들이 모효를 철종이라고 했습니다. 강화도에서 고기잡던 소년이 불려와서 임금이 된 것인데,종이라고 했습니다.
 
조로 되어서 로 되었어야 했습니다 묘호 규칙을 엄청나게 위반한 것입니다. 선임금.인 임금.철 임금, 이 세 임금이 모두 궁궐 밖에서 들어 간 임금이다. 묘호가 임금으로 되었어야 마땅한데 임금으로 정해졌다. 실록 이름이 으로 되어서 출간되었으니,책이름에 따라 으로 표시할수 밖에 없습니다. 철종 묘호를 철로 바로잡으려고 하면 많은 시간이 필요합니다. 원칙이 없는 세상이 되어서는 안 되기에 언제인가는 바로잡아야 됩니다. 원칙이 없으면 무법천지로 됩니다.
 
장김이 바꾼 묘호를 사용하기 싫어서 기정진(奇正鎭)은 로론당원이지만 <英宗昇假, 爲文배哭>이라는 행장글을 지었습니다.
 
철종 12년(1816년)에 경주 사람 최제우(崔濟愚)가 칼노래(劍歌)를 지었습니다. 최제우는 무인이 아니어서 혁명가로 될 수가 없습니다.
 
시호 시호 이내 시호, 부재래지 소호로다
만세일시 장부로서, 오만년지 시호로다
용천검 드는칼을, 아니쓰고 무엇하리
무수장삼 떨쳐입고, 이칼저칼 넌즛들여
호호망망, 넓은천지, 일신으로 비켜서서
칼노래 한곡조를, 시호시호 불러내니
룡천검 날랜칼은, 일월을 희롱하고,
게으른 무수장산, 우주에 덮혀있네
만고명정 어데있나, 장부당전 무잔사라
좋을시구 이내신명, 이내신명 좋을시구,
 
<대는 왔다. 때는 왔다. 우리들에게 때는 왔다. 만년에 한번 나오는 장부로서, 5만 년에 한번 닥치는 때가 왔다. 용천검이라는 칼을 아니쓰고 무엇하랴. 관복(무수장삼)을 떨쳐 입고, 이칼저칼 넌즛 들어 아득한 넓은 천지 한몸으로 비껴 서서, <때가 왔도다>라는 칼노래 한 곡조를 불러대니, 용천검 드는 칼은 해달 보다 밝은데 게으른 세도 벼슬아치(무수장삼)들이 우주에 덮여 있네. 만고에 이름난 장수가 어디에 있더냐. 장부 앞에는 원래 장사라는 것이 없나니라. 장부가 곧 장사이니라. 좋구나, 이 나의 신명이, 나의 신명이 좋구나>라는 뜻으로 됩니다. 최제우는 무관이 아니어서 혁명가로 될수가 없습니다.
 
비애왕 1년(1864년) 2월 최제우가 대구 감영에서 문초를 받았습니다. 경상감사 서헌순 정부에 보고하는 글에서 무수장삼 <無袖長衫>이라고 적었습니다. 최제우 진술로는 글자 그대로 <춤추는 긴 적삼소매>라고 했습니다. 최제우는 혁명가가 될 수 없습니다. 혁명가가 되려고 하면, 이성계 장군을 배워야 하고, 박원종 장군을 배워야 하고, 리 귀 장군을 배워야 합니다. 김문기 장군이 실패한 것도 공부해야 합니다. 최제우는 벼슬이 없는 야인입니다. 혁명은 무인이라야 할 수 있습니다.
 
최제우가 일으킨 동학은 민심을 흔드는 동학으로 되어서 민란을 부채질했습니다. 동학인은 뜻 밖에도 일본 이등박문에게 고마운 사람들로 되었습니다. 동학이 나라를 혼란스럽게 만들었습니다. 그 틈에 일본이 쳐들어 오도록 빌미를 주었습니다. 동학이 일본을 도우기하는 쪽으로 되었습니다. 바다 건너 일본 세력이 조선땅을 삼키려고 노리고 있을 때, 마침 동학이 시끄럽게 혁명노래를 부르고 있었습니다. 결국 적을 도우기하는 꼴로 되어 버렸습니다. 동학이 뜻 밖에도 리적행위가 된 것입니다.

큰인물이 되려고 하면 시불리(時不利)를 알아야 합니다. 최제우는 조선학이 없는 사람이었습니다. <人乃天>이 조선학이 될 수가 없습니다. 최제우 후계자들이 계속 나라를 잊어버리는 곳으로 가서 선동꾼으로 되었습니다. 조선학이 없으면서 <東학>이라고 합니다. <人乃天>은 <西학>입니다.
 
일본으로서는 옛날 문록전역에 실패했던 한을 가슴에 새기고, 이번에는 꼭 성공하리라고 서두르고 있던 사람이 이등박문이었습니다. 동학란은 뜻 밖에도 이등박문을 도우게 된 것입니다.
(배달겨레 문화사)
 

 
기사입력: 2005/05/05 [11:17]  최종편집: ⓒ 호남조은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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