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도밭에서 꽃피운 농부시인의 진솔한 인생 이야기
류기봉의 <포도밭편지>
 
이준 기자
‘포도시인’으로 잘 알려진 류기봉 시인의 첫 자연산문집이다. 이 책에는 자식처럼 애인처럼 소중한 포도나무를 키우며 깨달은 흙, 생명, 문학, 인간에 대한 진솔한 이야기를 담고 있다. 30여 년 전 아버지가 남양주 장현리의 거친 산을 개간해 농사를 짓기 시작하여 지금은 부자가 함께 포도밭을 일궈오고 있다.

원래는 시를 쓰기 위해 차선으로 선택한 것이 포도농사였는데, 이것이 류 시인의 인생과 시를 바꾸는 결정적인 전환점이 되었다. 책에는 “사람과 자연을 속일 생각 말고 성실히 살라”는 아버지 말씀처럼 포도밭을 일구며 살아가는 한 농부시인의 정직하고 건강한 마음풍경이 잘 담겨져 있다.

건강한 흙에서 건강한 인생을 배우다
무엇보다 류기봉 포도밭의 가장 큰 미덕은 건강함이다. 포도밭의 흙을 조금만 들춰도 크고 건강한 지렁이들이 활개를 치며 흙 속을 돌아다닌다. 건강한 흙에서만 볼 수 있는 특별한 모습이다.

류 시인은 “흙이 건강해야 포도나무가 건강하고, 결국 그 열매를 먹는 사람도 건강해진다”고 믿는다. 그래서 류기봉 포도밭의 확고한 원칙 중 하나가 바로 유기농법이다. 이 포도밭의 포도나무들은 화학농약을 한 방울도 구경하지 않은 자연산 포도를 생산한다. 그러나 그도 처음부터 유기농법을 시작한 것은 아니었다.

평상시처럼 포도밭에 제초제를 뿌리던 여름 어느 날, 갑자기 이상한 경험을 하게 된다. 분무기로 뿜어대는 물살에 들풀들의 흐늘거림이 마치 자신을 향해 “살려달라”고 애걸하는 몸부림으로 보였던 것이다. 이 일을 계기로 그는 포도밭에서 소중한 깨달음을 얻었다. 바로 “풀들도 생명이 있다. 그러니 구원을 주고 사랑을 해주어야겠다. 이것이 기독교에서 말하는 예수님의 사랑이고, 동학의 생명사상”이라고.

이렇게 시작한 유기농법은 출발부터 시행착오가 많았다. 농약을 치지 않고 농사를 힘들게 짓다보니 어느 해에는 5000평의 포도밭에서 포도수확을 고작 200만원어치밖에 거두지 못했다.

다행히 이제는 포도나무들도 화학비료가 아닌 자연비료에 잘 적응해서 맛좋고 영양 만점인 류기봉의 유기농 포도들을 많이 생산해내고 있다. 사람의 몸으로 들어가는 먹을거리를 생산하는 농부로서 그는 이제 자신 있게 말한다. “건강한 흙에서 건강한 포도가 나오고, 건강한 사람이 건강한 인생을 낳는다.”

문화의 향기가 흐르는 류기봉 포도밭
또한 류기봉 포도밭에는 문화의 향기가 물씬 풍긴다. 포도밭 한쪽에 놓인 중고 카세트에서는 바흐, 모차르트의 클래식 음악이 흘러나온다. 김춘수, 박완서, 정현종, 이문재 등 20여 시인들의 포도나무 앞에는 문인들의 친필 시가 걸려 있다.

매년 포도 수확철인 9월 첫 번째 주말에는 문인들과 일반손님들을 초청해 ‘포도밭 작은 예술제’를 열고 있다.(올해로 9회째를 맞는다. 아래 별첨 참고) 이 행사는 프랑스의 포도축제를 둘러본 (故)김춘수 선생님의 제안으로 시작되었다.

이 날에는 한 해 포도수확을 축하하고, 문인들의 시 낭송과 그림전시, 흙 밝기 등 다양한 행사가 펼쳐진다. 포도와 함께 익어가는 가을을 맞아 열리는 포도밭의 문화축제를 통해 자연과 사람, 그리고 문화가 하나 되는 소중한 시간을 갖고 있다.

땅에 뿌리박은 농부의 고달픈 삶, 그래도 살아가리라
“유기농을 하는 농부들은 이중삼중의 어려움을 겪고 있다. 화학농법에 길들여진 부모 세대로부터 외면당하고 실패할 확률도 많다. 성공해도 돈벌이가 되지 않는다. 유기농은 자기와의 외로운 싸움이다.”

이문재 시인의 말처럼 류기봉은 이 땅에서 농부로 살아가는 고달픔과 어려움도 토로한다. 한·칠레 자유무역협정이 체결된 날이 갑자기 ‘애플데이’로 둔갑하여 농부들의 눈물을 감추고, 가정환경조사서에 농부 아빠가 창피해서 몰래 시인이라고 적어놓는 딸내미를 보며 정신이 퍼뜩 나기도 한다.

또 배고픈 농부이자 시인 남편을 대신해 항상 일을 해온 아내의 모습을 지켜보는 힘없는 남편은 남모래 눈물을 흘린다. 그러나 그는 희망을 버리지 않는다. 영혼을 살찌우는 시인, 또 몸을 살찌우는 포도농사를 짓는 농부, 이 두 삶이 류기봉 자신을 든든한 나무뿌리처럼 받치고 있기 때문이다.

“기봉아, 나무에게 너무 많은 짐을 짊어지게 하지 말거라. 욕심 부리지 않고 다 가볍게 사는 게 좋은 거다.” 농부시인 류기봉은 오늘도 아버지의 말씀을 가슴에 새기며 장현리 포도밭의 행복한 지킴이로 살아가리라 굳게 다짐한다.

기사입력: 2007/01/19 [13:10]  최종편집: ⓒ 호남조은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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