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주에서 신라의 ‘황칠(黃漆)’ 확인
 
조길화 기자
문화재청 국립경주문화재연구소(소장 지병목)는 경주 계림북편에 위치하고 있는 황남동 123-2번지 유적에서 검출된 유기물질에 대한 분석을 통해, 신라의 ‘황칠(黃漆)’을 확인하였다. 이번에 확인된 황칠은 유적에서 출토된 인화문 토기의 바닥에 남아있는 유기물질 덩어리에 대한 지방산 분석(동식물의 생체구성성분 중 하나인 지방을 구성하고 있는 지방산과 스테롤의 구조 및 조성의 차이에 따라 고고자료에 함유된 유기물질이 어떤 종류인지를 밝혀내는 분석)을 하기 위해 일부시료를 국립중앙박물관 보존과학실에 분석 의뢰하여 밝혀지게 되었다.

분석결과에 의하면, 황남동 123-2번지 유적에서 확인된 유기물질은 변환 적외선 분광분석(FT-IR) 방법과 질량분석기부착 가스크로마토그래피(GC-MS)분석 방법을 이용하여 분석하였다. 그 유기물질은 목질계 수지(resin) 성분류로 추정되며, 분자량 204인 쌍환성 정유성분인 베타 셀리넨(β-selinene)과 쌍환성 정유성분에서 유도된 것으로 알려진 방향족화합물(cadalene, C15H18)이 주성분인 것으로 파악되었다. 특히, 주성분이 쌍환성 정유성분인 우리나라의 해남산 황칠의 파장범위가 유사하여, 경주의 것이 해남산 황칠일 가능성이 매우 높은 것으로 분석되었다.

황칠이란, 생칠 또는 주칠, 흑칠과 같이 여러 종류의 공예품 표면을 칠하는 공예의 한 기법으로 황금빛이 나는 천연도료이다. 높이 약 15m의 두릅나무과에 속하는 황칠나무에서 채취한 액체를 정제하여 사용된다. 빛깔이 화려한 금빛이며, 내구성을 강화시켜 제품의 수명을 연장시킨다. 뿐만 아니라, 안식향(安息香)이라는 독특한 향기를가지고 있어서 사람의 신경을 안정시키는데 큰 역할을 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 나무는 난대성 활엽수로 우리나라에서는 완도와 보길도, 거문도 등 전남 서남해안지역과 제주도 등에 자생한다. 또한 나무에서 체취·가공된 황칠은 금속과 목재, 종이 등의 도색을 위해 삼국시대부터 고급제품의 외장에 널리 사용되었다.

『삼국사기』고구려본기에는 “백제가 금칠을 한 갑옷[金?鎧]을 바쳐왔는데, ··· 갑옷의 광채가 하늘에 빛났다. [「고구려본기」제9권 보장왕 4년(645년)]” 라고 기록되어 있으며, 조선후기 역사가인 한치윤이 저술한 『해동역사』에는 “(황칠나무는) 백제 서남해에 나며, 기물에 칠하면 황금색이 되고, 휘황한 광채는 눈을 부시게 한다.” 라고 기록되어 있다. 또한 신라 관직명 중에는 칠전(漆典)이라는 특별한 관청명이 있는 것으로 보아 칠의 수요와 공급을 국가기관에서 관장하였음을 암시한다. 이를 통해, 황칠은 부와 권력의 상징으로 삼국시대에 유행하였던 장식문화임을 알 수 있다.

이러한 황칠은 조선시대 중국의 지나친 조공요구, 조정의 공납요구 및 일제강점기를 거침에 따라 원목뿐만 아니라 가공기술마저도 그 명맥이 유지되지 못하였다. 조선후기의 실학자인 다산 정약용의 『다산시선』에 「황칠」이라는 한시가 있다. 여기에 “공납으로 해마다 공장으로 옮기는데 서리들 농간을 막을 길 없어 지방민들이 이 나무를 악목(惡木)이라 여기고서 밤마다 도끼 들고 몰래 와서 찍었다네” 라는 대목을 보면, 당시 황칠나무에 대한 남획이 얼마나 심하였는지를 단적으로 알 수 있다. 이러한 여건으로 인해 황칠은 그 실체를 밝히기 어려웠으나 이번 분석결과로 기록으로만 남아 있던 황칠에 대한 역사성을 파악할 수 있게 되었다.

한편, 황남동 123-2번지 유적에서 황칠이 담겨진 토기는 건물지의 기둥을 세우기 위해 조성한 건물의 적심주변에서 발견되었는데, 토기는 의도적으로 파묻은 것으로 보인다. 이 회청색의 둥근 사발모양 토기는 말굽모양의 작은 인화문이 외면에 시문되어 있고, 저부에는 낮은 굽이 붙어 있다. 7세기대에 유행한 것으로, 출토 당시 뚜껑이 덮여 있고 적갈색 유기물 덩어리가 바닥에 말라붙어 있었다. 이 유기물질 덩어리가 분석 결과, 바로 황칠로 밝혀진 것이다. 이번에 황칠이 확인된 경주 황남동 123-2번지 유적은 계림 북편에 위치하고 있으며, 2006년 8월에 발굴조사가 이루어졌다. 유적에는 7세기에서 8세기대에 이르는 대형 건물지가 밀집되어 있다. 특히, 이곳에서는 바닥이 둥글고 아가리가 짧게 벌어진 높이 40cm 내외의 대형 항아리 5개가 나란히 묻힌 지진구(地鎭具)가 발견되어, 이 곳의 건물지는 특수한 성격을 띠고 있을 가능성이 높은 것으로 파악된다.

국립경주문화재연구소가 발굴한 토기 내부의 유기물질이 황칠성분이라는 것이 밝혀짐에 따라, 황남동 123-2번지의 대형 건물유적이 신라국가에서 중요한 역할을 담당한 시설이었다는 점을 추정할 수 있다. 따라서 황칠이 확인된 대형 건물지와 근거리에 위치한 월성이 신라의 궁성이었을 가능성이 보다 높아졌다. 특히 땅의 악한 기운을 누르고 선한 기운을 북돋우기 위해 건물 기둥자리에 의도적으로 매납(埋納)한 지진구(地鎭具)로 추정되는 토기에 황칠 덩어리를 담아두었다는 사실은 이 황칠이 고대사회에서 특별한 의미를 지닌 물질로 이용되었음을 알 수 있다. 



황칠 관련 사진 자료

황칠이 담겨진 토기의 출토상태

토기 바닥에 남겨진 황칠덩어리
황칠나무





기사입력: 2007/02/15 [17:12]  최종편집: ⓒ 호남조은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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