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5년 포츠담서 38도선 분할점령 밀약
한반도 분단의 역사는 이렇게 시작돼..
 
김종길 기자
▲독일, 포츠담 선언의 현장    


한반도 분단의 역사는 이렇게 시작되었다.
 
1943년11월 카이로 회담에서 적절한 시기에 한국을 독립시킬것을 결의 하였으며 1945년얄타회담에서 미.영.소 연합국 종전대책에서 미국측 루즈벨트.영국의 처칠수상. 소련의 스탈린수상은 1945년2월 4일부터 11일까지대일본전에 참전논의를 하였다.이 때에는 한국문제가 공식적인 논의는 없었으나 미국측의 루즈벨트는 미.중.소 3개국에 의한 20년내지 30년동안 신탁통치를 제안 하였고 이에 대하여 소련의 스탈린은 통치기간은 짧을수록 좋으며 외국 군대의 주둔에는 반대하였다.

1945년 7월16일 미국의 원자폭탄 실험이 성공함에 따라 독일 베를린의 포츠담에서 미국의 트루만 대통령. 영국의 처칠수상. 중국의 장개석총통  3인의 선언은 무조건의 항복을 요구하는 포츠담 선언을 일본측에 최후 통첩을 발표 하였다.

이선언의 내용을 보면 카이로 선언의 제8항에는 "카이로조항을 이행하도록 되어 있으며 한국의 독립은 카이로조항 제8항에 기초를두어 합의를 한것이다.
다시 말하면 43년 12월1일 3대 동맹국의 카이로 선언과 45년7월26일 포츠회담 선언에 따라 한국의 독립은 국제적인 관심사로 떠오르게 된다.

그때까지 소련은 일본과의 불가침 조약을 체결하고 있던 소련도 포츠담 회담에 옵서버 자격으로 참석하여 대일전에 참가하기로 연합국에 통보하면서 남.북 분단의 비극은 여기서부터 시작된다.
 
1945년7월16일 미국의 원자폭탄 실험이 성공함에 따라 1945년 8월6일새벽 1시45분 일본 히로시마에 원폭이 투하되면서 섭씨300.000만도 에 이르는 불기둥은 반경250M로 부풀어 올랐으며 7KM 상공까지 버섯구름이 치솟아 올랐다.

일본정부는 45년8월6일 1시45분에 히로시마에 투하된 원자폭탄의 위력을 본 일본은 1945년 8월9일 10시30분에 일본 나가사키에 제2의 원자폭탄이 투하되면서 1945년8월14일 정오에 일본 국왕의 결심으로 무조건 항복을 결정했다. 일본 국왕은 무조건 항복 선언내용 녹음을 8월14일 밤11시50분에 녹음하여 다음날 8월15일 정오에 발표되었다.

이로서 한반도는 일본으로부터 해방되면서 미 국무성 육해군 합동조정위원회(SWNCC)는 8월13일 38도선 남북 분할 점령안을 마련해서 미국 트루만 대통령에게 건의 하였으며 트루만 대통령은 이를 받아들여 소련에 통보했고 소련은 이를 수락하겠다고 회답했다.

이같은 미.소간의 한반도 분할점령 계획에 따라 공식적으로 맥아더 미 극동사령부가 9월2일 38도선 분활점령을 공식 발표했다.미.소간의 분활점령 합의에 따라 맥아더 사령부는 9월7일 도쿄에서 발표한 9월9일자 포고문 1호를 통해 남한의 통치권을 미군정하에 두는 군정을 실시한다고 밝히고. 미 군정 포고문 1호에서 북위 38도선 이남의 조선 영토와 조선 인민에 대한 무장을 해제하고 통치권은 미국 태평양육군 멕아더 사령부는 다음과같은 성명서를 발표한다.

*38도선 이남은 미 태평양 멕아더 사령부가 통치한다.
*점령군에 대한 반항 행위나 공공 안녕을 교란하는 행위는 엄벌에 처한다.
*공용어는 영어로 한다.
*모든공공업무와 기록과 재산은 그대로 유지한다
*포고문2호에서는 한국인 범죄는 미군정청 법정에서 재판한다라 고 공표 했다. 이에따라 9월11일 하지중장은 아놀드 소장을 미 군정 장관에 임명하였다.

9월18일에는 남한내각 정당 대표자들에게 건국제언을 요청하여 같은날 집회 시위에 관해서는 허가제를 실시한다고 발표하였다. 이같은 남한에 대한 미군정은 48년8월15일 대한민국정부가 정식 발족때까지 3년간 계속 되었다.사실상 한민족 비극의 분단은 6.25전쟁 이전 미.소 양국의 분할점령 계획에 따라 시작 된것을 증명하여준다.

이로서 남북정부 단독 수립을 반대한 민족의 지도자 김구  김규식이 48년4월19남북요인 15인 회담과 남북 4김회담을 계속 해 왔으나 남과 북의 단독정부가 수립 되므로서 실질적 의미는 퇴색 되어 버렸고 회담은 결과적으로 북한 정권의 정통성 선전에 이용당하고 말았다.

이후 민족의 지도자 김구는 남북 단독정부 수립을 반대하는 활동을 하다1949년 6월 26일 안두희에 의해  암살당했다. 실질적 분단의 책임은 미.소 양국의 분할점령 계획에 따라 이남은 미군정의 비호아레 남한 단독 정부가 들어섰으며 38도선 이북은 소련의 비호 아레 북한 단독정부가 들어 서게 된것이다.

그 이후 남.북 정치꾼들 의 정권야욕이 6.25를 불러 왔으며 한반도의 허리를 두동강내는 동족상전의 비극을 겪어야만 했다.
기사입력: 2005/07/15 [20:52]  최종편집: ⓒ 호남조은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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